공자가 살던 東周(동주) 즉 春秋(춘추)시대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여 임금을 보필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세상을 등지고 유유자적해야 한다는 하나의 不文律(불문율)이 존재했다. 이는 商(상)나라의 폭군 紂王(주왕)에게 부단히 충언을 하던 미자와 기자 그리고 비간에게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기인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서, 현명한 신하들 사이에서는 상호 공감하는 일종의 행동강령이 탄생했다. 그것은 바로 임금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충언을 해봤자 오히려 자신에게만 해가 될 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저 나라를 떠나 유유자적하면서 시기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현명한 신하들이 속속 나라를 떠나 재야에 묻혀 살았는데, 유독 공자만은 끝까지 남아서 세상을 바꾸려 하였다. 이때 적잖은 은자들은 공자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공자는 이런 혼란기에 임금 곁에 남아서 권력이나 자신의 사사로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부하기 급급한 인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수사적 발언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가 당시의 불문율을 인지하고 있었는지 여부와 나아가 찬성 여부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 결과 공자에게 있어서 불문율을 따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은 단순히 맞거나 틀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두 가지 태도 모두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고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굳이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16-11의 “은거함으로써 그 뜻을 구하고, 의로움을 행함으로써 그 도에 이른다. 나는 그런 말을 들었지만,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말과 18-7에서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장유유서의 예절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니; 임금과 신하의 의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자기의 몸을 깨끗이 하려다 큰 윤리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그 의를 행하는 것이다. 도가 행해지지 못함은, 이미 알고 있다.”라고 말한 자로가 공자의 입장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으니, 결국 공자는 道(도)가 땅에 떨어져도 끝까지 세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말로 그친 게 아니라, 안될 줄 알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의로움을 몸소 실천하는 진정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바로 이 점이 공자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주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