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고는 1965년 내한해서 1994년 독일로 돌아간 독일 여성 마리아 사 일러를 중심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농민운동의 발전과 국제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리아가 1960년대 중반 한국으로 온 이유는 서독 학생운동 전개, 뮌 헨의 제3세계 학생들과의 교류, 서독 가톨릭의 제3세계에 대한 관심 등이 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는 파독광부와의 만남이었다. 마리아는 1968년부터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국제적 인 관계망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적인 관계망 구축은 국제가톨릭 농촌청년회인 미작 회원으로 1971년에 가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국제 가톨릭농촌청년회인 미작과 실질적인 관계 형성은 마리아가 국제협력 업무를 전담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이후 국제가톨릭농민운동의 방향에 따라 한국가톨릭농민운동도 인간개발과 사회개발에 중점을 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국가톨릭농민회가 미작 회원이 된 후에 국제기독교관계망은 확대되 었다. 서독, 네덜란드, 호주와 캐나다의 APHD, 영국 크리스천 에이드, 인 도, 필리핀, 월남 등의 기독교기구들과 국제적으로 연대하였다. 개발원조지원은 서독, 네덜란드, APHD, 크리스천 에이드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독 가톨릭은 한국가톨릭농민회의 예산액을 거의 담당하였다. 서독의 지원은 서독 동부지역 파더보른교구 KLJB와 미제레오에서 담당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네덜란드 세베모와의 연대였다. APHD는 1977년부터 재 정적 지원을 시작했다. 한국가톨릭농민회는 한국농촌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 등을 보냈으며, 회원들은 APHD 세미나, 현장 체험, 회원단체의 행 사 등에 참석함으로써 한국농민운동을 발전시켰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 는 국제기구는 크리스천 에이드였다. 1978년 크리스천 에이드는 미작을 통해 한국 가톨릭농민운동의 지역발전 프로젝트를 위한 지원금을 보냈 는데 주로 여성자원개발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한국가톨릭농민운동의 국제적인 관계망 구축뿐만 아니라 한국여성농민운동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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