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암각화와 명문은 이 바위가 오랜 기간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곳이었음을 알게 한다. 빠르면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이 찾았던 이 바위는 신령스러운 존재, 곧 신이 머무는 곳이었고, 사람과 신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한가운데 있었다. 깊은 골짝의 개울 옆에 서 있는 특별히 크고 편평하며 앞으로 약간 숙인 이 바위를 찾은 이들은 둘레에 신비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BR> 천전리 각석과 그 주변은 신성 공간이라는 관념이 적용될 수 있는 곳이어서 선사시대부터 끊임없이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사냥꾼 사회 사람들은 그들의 사냥이 성공하기를 빌며 바위에 점 쪼기 동물문을 남겼고, 농사꾼 사회를 꾸리던 이들은 그들의 한 해 농사가 풍작으로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깊게 갈아 새긴 선 쪼기 기하문을 바위에 새겼다.<BR> 역사시대에도 천전리 각석과 그 둘레는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다. 이 바위를 찾은 사람들은 가는 선 그림으로 그들의 방문을 알렸고, 漢字로 이름을 새겨 바위에 머문 신이 그들을 기억하기를 바랐다. 신라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 갈문왕 일행도 이 신성 공간 안에 들어오기 위해 신라 왕경의 끄트머리에 있는 오랜 골짝을 찾았다.<BR> 사부지갈문왕 일행이 천전리 각석에 남긴 원명, 뒤이어 사부지갈문왕의 아들 심맥부지와 어머니 지몰시혜비 일행이 다시 이곳을 찾아 새긴 추명은 신라왕경 사람들이 이 신성 공간을 다시 인식하고 찾는 계기가 되었다. 한동안 천전리 각석은 신라 왕가 사람들과 왕경의 귀족이 자주 찾는 신성한 곳이 되었다. 이곳을 찾은 신분 높은 이들은 저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 그들이 다녀갔음을 기억할 수 있게 했다.<BR> 그러나 법흥왕의 주도로 불교가 공인되고, 사부지갈문왕의 아들 심맥부지가 진흥왕으로 즉위하여 불교 전파에 앞장서면서 천전리 각석을 찾는 왕경 귀족들의 발길은 뜸해지기 시작했다. 불교사원이 새로운 신성 공간으로 인식되고, 불교 승려들이 전통신앙의 사제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전리 각석에 부여되었던 신라 왕가와 귀족들의 신성 공간으로서의 위상도 점차 약해졌다.<BR> 신라 왕가 사람들과 귀족들의 발길은 뜸해졌지만, 신성 공간으로서의 천전리 각석의 기능과 역할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도 도시 중심, 귀족 중심 불교는 신앙 전파의 대상으로 일반 백성을 소외시키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귀족들이 거의 찾지 않게 된 뒤, 평범한 사람들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천전리 각석을 부지런히 찾았다. 이들에게 천전리 각석은 왕가 사람들과 귀족들도 찾았던 의미 있는 곳이었고, 여기에서 신에게 기도하면 아기를 가진다든가, 굶지 않고 지낼 수 있게 신이 돕는 신령스러운 장소였다. 특별히 왕가 사람들이 남긴 원명과 추명의 위나 둘레에 선을 긋고, 한자로 된 명문을 새기면 기도의 효험이 더한다고 여겼으므로 이 긴 명문 둘레는 수없이 덧대어 그은 선과 단자, 단구로 가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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