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고찰은 만해 한용운이 1912년 가을, 만주행을 단행한 배경, 전후 과정, 의의 등을 정리한 논고이다. 그러나 지금껏 한용운의 만주행은 연구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한용운은 1910년 국권상실 전후의 공간에서 불교개혁을 강조하고, 임제종 운동을 추진하다가 일제의 외압에 직면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분 전환을 위해 서울을 떠나 만주로 갔으니 그곳은 서간도 유하현 지역이었다. 당시 그곳은 독립운동가와 항일 청년들이 일제를 물리치려는 독립전쟁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곳이었다. 한용운은 그곳에 2개월 간을 머물면서 독립운동가와 대화를 하고, 민족의식을 재충전하였다. 그 당시 한용운은 독립전쟁론 보다는 국내에서 민중과 고락을 함께하는 정신적인 독립운동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은 귀가 도중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쏜 총을 머리에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극적인 체험을 하였다. 이는 한용운의 국내 민족운동론에 반발한 청년들의 저격이 야기한 참사이었다. 한용운의 만주행은 한용운의 삶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행보이었다. 즉 한용운은 만주에서의 체험을 평생 동안 지니고 있었다. 이에 필자는 한용운이 만주행을 단행한 배경, 만주행의 전모, 성격 등을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또한 만주행으로 인연을 맺은 독립운동가인 이회영과 김동삼과의 연관성, 그리고 한용운 생애에서의 만주행이 갖고 있는 역사성을 들추어 내고자 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서술된 본 고찰이 한용운의 생애, 독립운동, 민족의식 등의 연구에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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