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서원준은 1933년 조선혁명군 국내유격대장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을 모집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노동자 출신으로 평양점원상조회, 평양노동청년회에서 활동하였고 평양노동연맹원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조선혁명군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1908년 5월 25일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이다. 아버지는 목수출신이었으며 노동자 집안으로 가난하였다. 때문에 서원준은 보통학교에서 조차 교육받지 못하였다. 그가 13세인 1920년에 평양에 정착하여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기도 하였고, 양말직공으로 일하며 가난한 가세를 도왔다. 보통학교조차 교육받지 못하였지만 평양에 정착한 후 3년간 야학에서 수학하였다. 서원준은 1924년 평양점원상조회에 가입하였고, 17세부터 평양점원상조회 간사로 일하였다. 평양점원상조회에서 간사로 일해온 서원준은 노동운동가였던 한해, 한종유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서원준은 1927년 2월 평양노동연맹원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평양노동청년회는 박철, 한종유 등과 함께 사유제산재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서원준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되어 8개월을 복역하고 1928년 9월 출옥하였다. 서원준은 출옥 후 1930년 4월 만주로 망명한다. 만주로 망명하게 된 것은 옥중에서 만난 김관우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1930년 10월에 조선혁명군 군사부 부사령이었던 양세봉의 권유로 동 당에 가입하였다. 조선혁명당에서 2년 반 동안 피복제조창, 자치부, 지방정세조사부에서 활동하였다. 서원준은 1932년 11월 고이허로부터 국내에 잠입하여 당의 활동자금과 연락기관을 설치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리고 자동권총과 탄환을 받아 1932년 12월 왕청문에서 안동현으로 이동하였다. 1933년 1월 15일 평안북도 용천군 남시역의 장날에 포목상점원으로부터 현금 1,600여원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송금하였다. 이후 서원준은 평양에서 군자금 모금을 계획한다. 평양 내에서 현금 수송액이 가장 큰 식산은행 평양지점을 목표로 하였다. 1933년 6월 3일 계획을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수상함을 감지한 일제 경관은 서원준이 은거해있던 가옥을 수색하였다. 서원준은 권총을 발사하며 수사를 피해 도주하였다. 도주 중 6월 10일에는 일제 경관을 저격하여 처단하기도 하였다. 일제 순사부장의 사망으로 인하여 일제는 더욱 삼엄한 수사망을 펼쳤다. 서원준은 6월 3일 오후 10시부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여 도주하고 6월 16일 오후 11시에 체포된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하여 서원준은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1935년 4월 30일, 28세의 나이로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일제 경관을 처단하며 벌였던 평양 군자금 모금 활동은 ‘평양권총사건’ 혹은 ‘평남권총사건’으로 불리며 서원준은 ‘권총청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활동은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에 대서특필되었다. 또한 『동아일보』는 1933년 6월 17일 호외를 발행하여 그의 활동에 대하여 단독보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또한 서원준의 사진을 포함하여 12건의 기사를 실어 대대적인 보도하였다. 서원준의 활동은 1933년 국내 항일독립운동 활동 중 대표적인 군자금 모금활동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행보는 노동자에서 독립운동가로 변모한 인문의 유형이라는 것에서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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