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연구는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생들을 중심으로 발간되었던 잡지 『문우』4호에 백석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그 형성 맥락을 고찰해 본 것이다. 이 산문에는 ‘사랑’을 주제로 한 고시조 80여수가 군집되어 있는데 16세에 백석이 이미 문단 활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자료이자 고시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작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고 산문에 수록된 시조들 중 일부는 백석의 창작 시조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 잡고 산문의 형성 과정을 입체적으로 살펴 작가에 대한 논증을 시도하고 산문에 수록된 고시조의 전반적 특징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잡지를 면밀하게 검토해 본 결과 잡지 『문우(文友)』 4호에는 김억의 창작 시조가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이라는 연시조의 내용이 백석의 산문에 수록된 고시조 내용소와 유사함이 발견되었다. 또한 김억과 백석은 평양 정주의 오산고보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여러 정황이 확인되었으며 무엇보다 1925년에 평안도 출신 문인들이 만든 잡지 『영대(靈臺)』 에 수록된 김억의 산문이 내용 전개 방식과 구성 면에서 백석의 와 매우 흡사함이 발견되었다. 그 동안 학계에서 백석이 김억의 제자였다는 점이 추정되기는 했었지만 실증 자료가 부족했었는데 이 산문을 통해 그 영향 관계가 선명하게 확인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산문에 수록된 고시조의 전반적 특징을 살펴 백석이 활자본 가집 『대동풍아(大東風雅)』에서 고시조를 주로 선별하고 부분적으로 다른 가집들을 참조하여 산문을 구성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백석은 이 산문에서 나름의 첨언(添言)과 비평을 통해 왜 시조를 통해 사랑의 문제를 다루는지에 대한 의식은 물론, 시조에 나타난 사랑의 다층적 면모들을 설명하면서 그 의미망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산문은 백석이 10대 시절 이미 고전문학에 대한 심미적 체험을 통해 형성된 문학적 자양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나아가 고시조가 1920년대 지식인들에게 수용되고 이해되던 방식의 다층성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문학사적 의의가 있으며 향후 이와 관련된 확장적 연구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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