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에는 전반적인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교회답게’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서구사회와 교회가 1960-70년대 세속화와 인간화의 거센 바람 속에서 몸부림 칠 때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과 존 스토트(John Stott)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1974년 로잔대회를 통해, 복음과 선교, 그리고 사회참여에 대한 고민을 성경중심으로 다시 확인하고 세계 복음주의 교회들 가운데 다시 한 번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지도자들도 1974년 로잔대회에 참석하며 한국교회 선교운동을 일으켰지만, 로잔운동과 로잔문서는 한국교회들 보다는 학생 선교단체들에게 더 큰 영향을 주었다 하용조(1946-2011년)는 ‘사도행전적 바로 그 교회’를 꿈꾸며 1985년에 온누리교회를 개척하였고 한국 복음주의 선교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어린 시절 그의 가족은 6.25전쟁 1.4후퇴 중, 목포에서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의 도움과 큰 영향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김준곤 목사의 지도 아래, CCC에서 7년간 간사로 사역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시절에는 한경직 목사와 풀러신학교 선교학 교수들인 아더 글래서(Arthur F. Glasser),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로부터 선교적 영향을 받아, 신학대학교 내에서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기도운동과 ‘선교사 파송 연구회’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1981-84년에 하용조는 영국으로 유학하여, WEC 국제선교회에서 선교사 후보생으로 선교훈련을 받고, 런던 인스티튜트에서 존 스토트로부터 1년간 배움과 개인적 관계를 맺으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 시기에 그의 복음적 선교신학이 형성되었고, 교회와 선교단체의 융합선교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하용조는 1-3차 로잔대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로잔 신학을 정립한 존 스토트로부터 선교신학을 배웠고, 김준곤, 한경직, 한철하 등 한국교계의 멘토들을 통해 그는 로잔 신학을 자연스럽게 전수받았다. 이러한 멘토 관계를 통해, 그의 선교적 목회철학이 형성되는 배경에 로잔운동의 선교신학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잔신학은 그가 개척하고 설립한 온누리교회를 비롯한 다양한 선교단체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체화 되었다. 로잔신학의 영향을 받은 하용조와 온누리교회는 전통적인 한국교회에서는 보고 드문 형태의 한국형 선교 교회(Korean mission church)로써, 복음 선교와 사회참여의 균형, 그리고 문화변혁을 추구하는 다양한 사역들을 실행하였다. 즉 두란노서원, 두란노해외선교회(TIM), CGNTV, 한동대학교, 온누리복지재단, 온누리M센터, 러브 소나타, 10/40 window 미전도 종족 입양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이렇듯 다양하고 폭넓은 국내외 선교사역과 사회참여적 사역들을 통해 온누리교회는 로잔신학이 로잔문서로 머물지 않고 실질적 형태로 한국 사회와 선교지에 구현되는데 기여하였다. 1989년 한국 로잔위원회 설립 이래, 한국 로잔위원회의 노력, 한국교회와 신학교들, 선교단체들에 확산된 로잔신학, 그리고 한국 로잔위원회 4대 의장이자 하용조의 후임으로 온누리교회의 담임목사를 맡게 된 이재훈의 헌신적 섬김은 2024년 제4차 로잔대회(50주년 기념)의 한국 개최를 유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용조와 온누리교회가 로잔신학을 통해 선교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와 아시아교회들이 세계 복음화라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더욱 헌신적으로 참여하며 성령의 충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대사명(The Great Gommission)을 완성할 수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