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중국은 唐代에 이르러 서방 금은기의 모방 단계를 벗어나 중국 취향의 금은기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공예 구조를 구축한다. 이와 더불어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금은기 문화를 형성하였다. 황제가 공이 있는 군신에게 褒賞, 賞與를 할 때, 또는 군신이 황제에게 進上을 할 때 금은기가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으로 인하여 당대 후기부터 私工匠을 통해 금은기를 제작하는 일이 활성화되었다. 개인의 주문에 의해 私匠들이 제작하는 양은 송대에 더욱 많아졌다. 『東京夢華錄』 등의 문헌자료뿐 아니라 최근 浙江省, 四川省, 江蘇省, 湖南省 등지에 분포된 송대 고분과 교장에서 출토된 금은기는 당시의 활발한 사용양상을 반영한다.BR 이 글에서는 송대에 사용된 금은기의 사회적 성격에 관심을 가지고, 송대 유적 중 가장 많은 기종과 수량이 출토된 사천성 팽주교장의 금은기를 중심으로 송대 금은기의 사용양상과 그 성격을 살펴보았다. 彭州窖藏은 1996년 4월, 四川省 成都市 西大街에서 발견된 교장으로 이제까지 송대 단일교장으로 최고양인 金器 27건 그리고 銀器 323건이 발굴되었다.BR 팽주교장의 금은 기물은 완, 잔, 탁잔, 병, 머리수식 등 생활용품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금은기들은 한 집안에서 일괄적으로 쓰던 실용 그릇이라는 점에서 송대 사회의 금은기 이용 방식을 복원할 수 있는 점에서 중요하다.BR 팽주교장의 금은기에는 소유자와 제작자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병, 탁, 완 등의 전체 기물에 “董”, “董宅,” “董子號”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팽주금은기의 주인은 동씨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鳥雲文梅甁에 새겨진 “庚午郡謨治”의 庚午는 嘉定三年 즉 1210년으로 보면 13세기 초반의 연대를 상정할 수 있어, 남송 후기까지 금은기의 연대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또한 “公家十分”, “袁家十分”, “周家十分”, “宋家十分記”, “陳家打造十分”, “寺家陳家”, “○陳六郞”, “○回官○” 등의 명문으로 보아 개인 사영공방과 사천지역에 소재한 지방 관영공방에서 제작한 금은기인 것을 확인하였다.BR 기형을 살펴보면, 대부분 매병, 주자와 승반, 탁, 등의 기형으로 술과 차에 관계된 식음료 기형이었다. 또한 동시대 남송시대에 유행한 연회용 기물의 범위에 있다. 이는 지리적으로는 변방에 있었던 사천성 팽주가 남송시대의 중심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낸다. 이와 관련하여 북송시기부터 유행하였던 古銅器 양식을 반영한 은잔, 承盤과 注子가 사용된 점이 주목된다. 더불어 동시대 유행하였던 기형속에 사천만의 독자적인 미감이 발견되는데, 銀製蓮蓋象紐折肩注子의 뚜껑이 코끼리장식으로 마감된 은기는 현재로는 이 지역 이외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조형이다. 이는 주문자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데, 남송 사천시기의 금은기 문화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예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남실크로드에 위치한 사천이 남송시기 서남권의 경제적 중요지인 점을 주목하였다. 또한 송대 銀本位 화폐정책으로 인하여 관영공방에서 제작된 銀錠이 활발하게 유통되었던 것을 중시하였다. 즉 순도 높은 은정을 은기의 재료로 바로 이용할 수 있었던 공방의 환경이 분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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