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조선시대 후기에는 정선(鄭敾, 1676-1759)에 의해 한국의 실재 자연을 표현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가 크게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정선 이전에도 이미 고려시대부터 한국에서는 실경산수화의 전통이 있었다. 그라고 최근에는 계회도(契會圖)를 중심으로 조선 중기 이전의 실경산수화에 대한 연구가 다수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선 초기ㆍ중기의 실경산수화가 실재 작품으로는 어떤 것들이 남아있는지, 그리고 그 작품들에 표현된 현장은 어디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부족했다. 따라서 이 글은 조선시대 초기와 중기의 실경산수화를 ‘실재 작품과 그 현장’을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이 글을 통해 필자는 조선 초기와 중기의 산수도 중 실재 경치를 그린 것을 다수 발굴하고, 그 현장을 제시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초기와 중기의 실경산수도들은 대부분 계회도나 각종 기록화들이다. 그중 특히 서울의 인왕, 백악, 삼각산을 조망한 〈동궁책봉도감계회도(東宮?封都藍契會圖)〉(1557)와 북한 평안도 영변 약산 동대(藥山 東臺)의 경관을 표현한 〈선전료우중회관서도(宣傳僚友重會關西圖)〉(1576)는 특히 장대한 구성과 세밀한 묘사로 이루어진 뛰어난 작품임을 확인하였다. 이 작품들은 조선 후기 정선의 실경산수화에 비해서도 예술적 완성도나 현장감의 표현 등에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조선 후기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17세기의 화가 한시각(韓時覺, 1621-?)과 조세걸(曺世傑, 1636-1705 이후)의 실경산수도들이다. 이 작품들은 16세기 작품들에 비해 한국의 실재 경치를 훨씬 더 사실적ㆍ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또 이 작품들을 그리게 한 주문자인 감수증(金壽增, 1624-1701),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등 문인 지식인들의 역할도 주목된다. 즉 뛰어난 회화는 시대적인 양식도 중요하지만 화가의 개인적 능력과 후원자, 주문자의 안목에 크게 좌우되었다. 이 글을 통해 조선 초기와 중기에도 이미 다양한 지역의 실경산수화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창작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본격적 진경산수화가 발달하기 훨씬 전부터 회화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우리나라 자연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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