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중국 후한의 蔡倫에 의해 발명된 제지기술이 삼국시대에 전래된 이후 고려시대에 더욱 발전하였다. 신라와 고려의 종이는 중국의 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최상의 교역 물목이었다. 고려에서는 종이 생산과 관련한 관청과 생산지가 존재하였으며, 종이의 제조 원료가 되는 닥나무의 충분한 확보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하였다.<BR> 이러한 제지 전통은 조선시대에 전승되어 건국 초기부터 막대한 양의 종이가 관수용으로 사용되었다. 실질적으로 조선 정부의 종이 사용 범위는 각 관청의 사무용, 저화 발행, 서적 간행, 喪葬用, 군수용 등 정부의 크고 작은 일용품은 물론이고, 사대교린용 및 민수용으로 특히 중요시되었다. 때문에 정부는 건국 초부터 종이 생산에 필요한 원료와 다양한 제지술의 확보를 위해 제도적ㆍ정책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BR> 그러나 점차 확대되는 종이 수요는 楮田 경작과 종이 생산에 한계를 보였고, 이에 대해 정부는 막대한 양의 종이 확보를 위해 우선적으로 공납체제를 정비하였다. 아울러 서울과 지방의 官營紙所에서 생산되는 종이 외에도 사원 등지에서 생산되었던 종이에 대해서도 관수용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종이 부족 원인으로 확인되는 몇몇 사실은 조선전기 역대 국왕들의 文治中心 정치에서도 영향을 받았다.<BR> 조선전기 확대된 종이 수요의 변화는 관찬지리지의 비교를 통해 확인되지만, 이러한 변화 양상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던 정부는 조선전기에도 지속되었을 것이라 생각되는 사원의 제지업에 대해서도 꾸준한 관심을 가졌다. 정부의 이러한 노력은 부족한 종이 공급처 확대를 위한 또 하나의 방편으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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