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20세기 초 미국에서 군의 시위 진압은 전투교리로 출발했다. 해방 이후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하에 놓인 한국군은 시위 진압의 교리, 훈련,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미군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미군정기에 처음 실시된 시위진압 훈련은 4·19혁명 이후 유엔군사령부의 지휘 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한일회담 반대운동기 실시된 시위진압 훈련도 미군의 교육 및 훈련을 모방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군의 시위진압 교리도 전투적 성격을 내재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정치적 변화로 인해 시위진압의 최소한의 현대화가 일어났으나 한국에서는 그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결과 1980년 한국군은 장갑차와 헬기를 동원하고 진압봉과 총검을 함께 사용했다. 거기에 더해 신군부의 과격진압 지시, 가혹한 정신교육, 군에게 초법적 힘을 주는 계엄이 더해져 5·18항쟁에 대한 과격진압을 낳았다. 한편, 1960년대 미국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대반란이라는 전략을 정치적 아젠다로 만들었다. 이러한 전략 하에 미 특수전 센터와 부대는 제3세계 군부와 경찰에 대반란 전략과 특수전 부대의 임무에 시위 진압이 포함된다는 인식을 전파했다. 또한 한국군은 베트남전을 통해서도 대반란전을 습득했다. 그러한 사고 속에서 특수전 부대가 시위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게릴라와 시민을 구별하지 않는 사고 속에서 극단적 폭력이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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