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공민왕은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파천을 단행하여 약 1년 3개월 동안의 행재소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 일행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공민왕 일행의 파천지로 흔히 안동이 잘 알려져 있으나, 공민왕은 안동보다 상주와 청주에서 더 오랜 기간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국정의 중요한 개혁을 단행하였고 원과의 외교에도 변화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공민왕의 몽진 지역으로 안동만이 주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홍건적 격퇴에 있어 안동이 갖고 있던 상징성 때문에 불거진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안동행궁 시절에 홍건적을 격퇴하였던 관계로, 홍건적의 침입하면 공민왕의 몽진과 안동이 자동적으로 연상되었던 것이다.BR 사실 공민왕은 상주와 청주에 체류하면서 피폐해진 민심을 복구하고 국정을 정상궤도로 되돌리기 위해 상당히 중요한 행보를 이어갔다. 우선, 홍건적이 개경에서 물러난 직후 分司體制를 도입하여 개경과의 연락망을 복구하여 還都에 대비하였다. 또한 행재소에서 정규의 사신을 파견하고 과거까지 設行함으로써 행궁의 건재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즉, 공민왕은 청주행궁에서 원나라에 보내는 정규사신을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使行에 부수되는 拜表儀禮까지 거행함으로써 고려 조정이 정상궤도에 올라섰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아울러 국자감시 · 예부시 · 승보시를 세 달 동안 연달아 설행하여 국정이 평소와 다르지 않게 운영되고 있음을 과시했다.BR 나아가 환도 이후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크고 작은 제도의 개선은 물론 관제의 개혁까지 단행했다. 관제의 개혁은 상주행궁에서 실시되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이때의 개혁은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고 원나라의 불신을 무마하여 군사적 제휴까지 도모하기 위해 실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재소에서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대외만큼이나 대내적 요인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도를 쉽게 외적에게 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감행함으로써 천하의 비웃음꺼리가 되었던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분명 국내적 요인이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공민왕은 아마도 관제개혁을 통해 환도 후에 행할 국정의 방향을 천명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혼란한 정국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려는 친원파의 준동을 제어하기 위해 그와 같은 개혁을 단행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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