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대한제국은 근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서양식 연회와 서양식생활 문화들을 수용하였다. 서양자기는 서구열강들과의 수요조약 체결 이후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유입되었고, 이후 각계각층의 외교사절들과 황실 구성원들의 연회, 사교 모임을 위해 다양하게 쓰였다. 서양자기 수입은 조선 말기 분원의 민영 전환 이후 백자 생산의 침체와 이로 인한 근대자기 생산력 부족현상으로 불가피했다. 따라서 일본과 프랑스를 위시한 도자강국으로부터 서구 양식의 자기들이 소량 수입되었으며, 그 가운데 프랑스자기는 유럽국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이 국내로 수입 되었다.<BR> 프랑스자기는 비단 황실에서뿐만 아니라 궁과 인접해 있던 정동 공사관 유적 일대에서도 일부 발굴되어, 당대 국내 인지도가 어느 정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대한제국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자기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에 한정되어있다. 이 소장품들은 대체로 대한제국의 문장인 이화문(季花文)이 시문된 경우가 많으며, 필리뷔(Pillivuy), 지앙(Gien) 등 당시로서는 매우 명성있는 도자기회사의 백색 식기류가 가장 많이 차지한다.<BR> 황실 내부에서의 프랑스자기 선호도는 그 근거를 명확하게 밝히기 어렵지만, 이 시기 서양문명을 수용하는데 협사하면서 황실 권속들과 결속되었던 서양 인사들의 기록에는 유난히 프랑스 식사예절을 선호하였고 프랑스 요리가 만찬메뉴로 등장하는 예를 종종 접할 수 있다. 특히 고종황제의 즉위 40년 경축연을 대비하여 프랑스 식기를 추가 주문한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프랑스자기의 적극적인 국내 유통을 위한 면세 청탁을 프랑스 주조공사(駐朝公使)가 주도하거나 한불흥업사(韓佛興業社)를 통해 프랑스자기들이 직수입되는 정황 등을 종합해 볼 때, 프랑스자기에 대한 대한제국 정부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BR> 프랑스자기의 유입에 따른 황실문화의 변화는 이 시기 외교정책 및 요업발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한제국 황실은 외세자기의 사용이 일종의 서양문물을 도입하는 절차로 인식하였으며, 나아가 서양자기 제도술(製陶術)을 습득하여 자체 생산을 도모하고자 했다. 따라서 근대기 프랑스자기의 국내 유입은 서양문물의 수용을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 국내 요업과의 인과성 및 황실 내부의 인식변화과정을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Full Text
Paper version not known

Talk to us

Join us for a 30 min session where you can share your feedback and ask us any queries you have

Schedule a call

Disclaimer: All third-party content on this website/platform is and will remain the property of their respective owners and is provided on "as is" basis without any warranties, express or implied. Use of third-party content does not indicate any affiliation, sponsorship with or endorsement by them. Any references to third-party content is to identify the corresponding services and shall be considered fair use under The CopyrightL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