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구려와 新 왕조(9~23) 관계의 전개와 결말을 살펴본 연구이다. 이 주제에 대한 정보는 『漢書』 王莽傳에서 얻을 수 있다. 新을 건국한 王莽은 四方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고구려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이를 통해 고구려는 현전 사료상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BR> 왕망은 주변 세력에 자국의 질서를 강요하였는데, 東方에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구려를 통해 흉노를 압박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고구려의 병사는 왕망의 흉노 공격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왕망의 요구는 고구려 병사의 도망과 離反의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高句驪侯 騶가 新의 嚴尤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는 『漢書』에서 ‘高句驪侯 騶’라고 하는 반면 『三國史記』에서는 ‘延丕’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장수 延丕가 高句驪侯 騶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해보았다. 고구려후 추의 죽음은 고구려와 新이 유지하고 있던 중간 고리가 소멸하였음을 의미한다. 이후 고구려는 더욱 新의 변경을 공격하였다.<BR> 新은 對內外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고 중국에는 後漢이 들어섰다. 고구려는 32년 후한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부여에 점차 우위를 확보하고 領東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다. 반면 後漢은 아직 ‘天下統一’을 달성하지 못한 가운데, 외부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구려가 선제적으로 사신을 파견한 이유는 자국의 유리한 상황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판단된다. 기존의 ‘高句驪侯’에서 ‘王’으로 되었다는 점은 그것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