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IMF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남성들은 ‘성공적인 남성성’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고 자기 안의 취약함과 대면해야 했다. 이를 가장 쉽게 외면할 수 있는 기만적인 방법이 바로 투사와 배제로서의 ‘여성 혐오’였다. 여성 혐오는 남성성의 왜곡된 구성과 재현 방식과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소호의 『캣콜링』은 혐오를 핵심적인 정동으로 삼고 있는 독특한 시집이다. 본고는 이 시집의 ‘여성 혐오’의 양상과 ‘남성성 구성’의 양상을 ‘정동적 경제’의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소호의 시에 등장하는 자매 관계는 서로에 대한 과잉된‘혐오’로 가득하다. 이는 가족 내 권력 관계에서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자매가 가장 만만한 존재인 서로에게 혐오를 전가하는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눈에 띄는 과잉된 혐오를 발화시키는 원인으로 ‘수치심’을 살펴봐야 한다. 일상화된 혐오의 세계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뒤 자매들은 수치심을 겪지만 엄마에게 혐오로 되돌려준다. 이 혐오의 정동적 경제 안에서 혐오 화폐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발권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아버지와 남성들이다. 즉 혐오와 수치심의 정동은 화자 개인적 차원에서 자연발생된 감정이 아니라 아버지가 보여주는 파렴치함에서 발원하여 가족들 사이를 흘러다니다가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 서로를 혐오하고 더 상처내는 방식으로 폭발함을 알 수 있다. 화자가 만나는 남성들은 상대방의 애정과 호의에 기대어, 상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정의한다. 이 시집의 여성이 보여주는 일상화된 혐오, 또는 여성혐오의 발원지에는 ‘남성 지배’를 지속하고 ‘헤게모니적 남성성’의 배당금을 잃기 싫은 남성들의 왜곡된 정동이 그 발원지로 작동한다. 결국 이소호의 시는 ‘여성을 혐오하는 여성’이라는 충격적인 관계를 통해 혐오 지폐의 발권자(또는 발권처)가 가족이라는 제도일 뿐 아니라 아버지를 비롯한 이 사회의 남성들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면에서 일정 정도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이소호의 시가 충격을 주는 이유는 “여성에게도 폭력과 혐오를 통해서나마 주체가 되고 싶은 맹목적인 주체화의 열정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혐오가 정치적인 정동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섬세한 고민이 필요하다. 재현의 관점에서라면, 파국에 이른 현실을 어떻게 그릴 수 있는지는 혐오를 빼 놓고 접근하기는 힘들 것이며 혐오가 만연되어 가는 세상에서 혐오를 서둘러 기각해버리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라는 견해를 덧붙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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