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고는 일본제국주의 지배 하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벚꽃의 문화접변을 분석했다. 벚꽃의 문화접변은 1910년을 전후해서 우이동을 중심으로 정착한 벚꽃구경이 1924년 이후 창경원의 벚꽃놀이로 변화해갔는데 구체적인 접변과정은 아래와 같다.BR 구평형은 1910년대 우이동의 벚꽃구경으로, 도심에서 떨어진 벚꽃 밀집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해 낮에 모여 자연경관의 벚꽃을 즐기는 상춘활동이다. 부분적인 해체는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의 벚꽃 명소의 필요성, 일제의 관제문화 정책과 주민의 반응, 교통 불편과 비용에 대한 불만, 도시민의 일상 탈출 욕구, 밤벚꽃놀이 요구 등이다.BR 부분적인 해체를 멈추기 위해 외래문화요소로서 일본 우에노공원의 벚꽃놀이가 전파되어 창경원에 제시되어 1918년경부터 벚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이에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인식한 조선인과 벚꽃을 즐길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반발했으나 1924년 밤벚꽃놀이가 열리면서 벚꽃놀이는 일단 수용되었다. 창경원의 벚꽃놀이는 우이동의 벚꽃구경과는 달리 접근성이 뛰어난 도심의 전통적인 장소에 근대적인 박물관 · 동물원 · 식물원 등과 인공 설비를 갖춘 복합공간에서 펼쳐졌다.BR 문화적 저항으로는 일본의 상징인 벚꽃에 대한 조선인들의 강한 거부감과 생활고로 인한 비용 부담, 지나친 향락에 대한 반발, 무질서와 탈선에 대한 거센 비판 등을 들 수 있다.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근대적인 기술의 전기 조명 장치를 확충하고 여흥을 위한 연예장을 설치했으며 영화를 상영하고 관광 연계 상품을 개발하는 등 재래의 문화요소도 변하면서 문화요소의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활기찬 벚꽃문화로 재구성되었다. 그 결과 창경원의 벚꽃놀이는 매년 봄이 되면 성황을 이루며 식민지 조선에서 상춘문화로 자리 잡아 신평형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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