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학문적 정통과 이단을 가늠하는 준거였던 ‘도학’과 ‘실학’ 개념이 20세기 근대 전환기에 들어서 일으킨 의미 변화는 전통 지식체계의 탈구축 과정을 탐색하는 데 유용한 사례다. 송대 주희 이후 도학은 유교의 도통을 잇고 이학과 심학의 강한 실천을 표상하는 용어로 재발명되었다. 불교에 대해 ‘실학’으로서 위상을 확립했던 유학은 근대 전환기 서양 학술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국가 사회의 운영원리였던 유교가 망국을 초래한 원인으로 부정되는 사이 서양학술은 단순한 기예에서 새로운 문명 건설을 가능하게 할 학문으로 위세를 더해갔다. 문명 진보의 신화는 전통 지식체계의 ‘도학’과 ‘실학’ 개념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인륜 도덕을 최우선의 가치로 추구했던 도학은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인식하지 못한 채 구습만을 고집하는 완고의 대명사가 되었다. 유교가 지녔던 실학으로서의 위상도 점차 서양 신학문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번역어 철학은 본래 서양의 ‘유학’을 동방의 유학과 구별하기 위한 용어로 고안되었으나 점차 전통 지식체계를 철학으로 재해석하면서 특정한 의미를 전유하는 한편 배제를 수행했다. 서양의 특수한 학문이었던 철학이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된 데에는 이러한 사정이 주효했다. 실학 개념을 전유하려는 유교개혁론과 문명개화론의 경쟁은 개념 수용 초기 철학 의미망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한편 개념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변화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근대 지식체계 형성과정에서 철학이 전통 지식체계를 재해석하는 틀로 기능하면서, 유학은 동양철학과 조선철학의 의미망 안에서 의미 지어졌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실학 개념을 둘러싼 학술사적 논쟁도 근대 지식체계 변화와 개념의 수행성에 주목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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