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제주는 본래 탐라국으로서 삼국시대에 신라ㆍ백제 등에 내조하였으며, 고려전기에 이르러서야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된다. 제주는 변경지역으로서 지방관이 파견된 이후에도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 왔다.<BR> 14세기 왜구의 주요활동무대인 남서해안에 가까운 위치에 있음에도 제주에는 왜구에 대한 사료는 많지 않다. 이는 왜구 활동 자체가 적었을 수도 있지만, 역사ㆍ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기록으로 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편으로 근대 학자들에 의해 제주마 혹은 난수산의 난과 관련하여 제주민과 왜구와의 관계가 의심받기도 하였다. 일본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제주민들이 증심이 되어 왜구가 일어났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개별 사례로서 어느 정도의 제휴가 있었을 가능성 자체를 닫아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BR> 조선 태종 대에는 왜구가 제주에서 백령도 등지를 소굴로 삼아 체류하면서 중국을 약탈하였는데, 이는 결국 기해동정을 야기하였다. 1443년(세종 25)의 제주공선 습격사건은 對馬島主 宗貞盛와 壹岐 왜구 출신 인물인 도쿠로의 협조에 의해 주동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조선 초 倭人 유력자에 대한 기미정책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BR> 왜구가 제주로 들어오는 항로는 남해의 도서를 따라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그 입구는 서쪽의 우도였다. 제주에서 왜구의 교두보로 이용되었던 곳은 우도, 비양도, 죽도(차귀도) 등의 본도 인근의 섬이었다. 서쪽의 차귀도는 왜구가 중국 장강 하구지역으로 진출하는 출입구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BR> 제주 출신으로 육지로 건너가 어로ㆍ채집을 일삼았던 두무악ㆍ포작인은 성종 대에 수적행위를 하였으며, 일부는 왜인으로 가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제주 출신 해민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양상이 아니라 성종 대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BR> 이상을 통해, 제주의 왜구 양상은 결국 제주의 역사적ㆍ지리적 요인에 큰 영향을 받아 육지와는 다른 전개 양상과 특징이 나타남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야 말로 여말선초 왜구 양상과 한ㆍ일 관계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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