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논문은 애장왕대 신라 왕실과의 관계 속에서 해인사가 창건된 내막을 살펴본 글이다. 순응대덕과 이정선백에 의해 애장왕 3년(802)에 창건된 해인사는 기본적으로 화엄종 사찰이었지만 중국 화엄종 4대조 징관의 영향으로 우두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중대의 화엄사찰이 아미타불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해인사는 비로자나불 중심의 화엄사찰을 지향하였다. 또한 해인사의 창건은 애장왕대 왕실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는데, 기록상으로는 혹은 애장왕이 혹은 그의 조모인 성목왕태후가 주도했던 것처럼 구별되어 있다. 그렇지만 전자의 경우는 애장왕이 왕후의 난치병을 고친 뒤에 국인을 시켜서 창건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그 국인은 다름 아닌 성목왕태후였다. 따라서 해인사의 창건에 관여했던 왕실의 단원은 사실상 성목왕태후였다. 그가 해인사를 창건한 것은 자신의 아들이자 당시 섭정이었던 김언승이 애장왕의 친정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애장왕이 이때 해인사에 전 2,500결을 시납했던 것도 성목왕태후와 김언승을 중심으로 한 섭정세력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그래서 애장왕은 친정을 시작한 뒤인 동왕 7년(806)에 도리어 ‘신창불사’를 금하는 교서를 내렸다. 애장왕과 모후인 소성왕비를 중심으로 한 친정세력은 이를 통해 섭정세력을 견제하면서 친정체제를 강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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