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의 불교 전래, 수용 및 공인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정사(正史)의 ‘본기(本紀)’ 연조(年條)에 설화의 내용을 기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서 편찬 시 참고한 다양한 자료나 전승된 이야기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 왕실의 권한이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강력하지 못하였고 귀족세력의 힘의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원인으로 삼을 수 있다. 또한 전통적인 무교사상이 사회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귀족세력은 이를 지지기반으로 하여 강력하게 왕권을 제약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BR 이런 배경에서 신라의 왕실이 불교를 수용하고 공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의 대외적 상황이 국가존립을 위해 부국강병을 해야 하는 시기였으며, 국방력 강화를 위해서는 농업생산력 확대를 통한 경제력 강화가 필요했다. 이를 위한 정책들이 불교 공인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었고, 그 과정에서 불교를 통해 새로운 사회질서와 통치이념을 구축하고자 하는 신흥 유산계급이 등장하여 왕권을 뒷받침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BR 염촉(厭髑)은 이 부류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으며, 법흥왕의 불교 공인정책 추진 과정에서 귀족세력의 반발로 야기된 염촉의 순교는 정치적 집단화되지 않았던 이 부류의 결속과 행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분위기는 전통적인 무교의 핵심적 요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불교의 포용력과 맞물려 무교 세력과 불교지지 세력 간의 정치적 타협과 종교신앙적 조정이 이루어짐으로써 흥륜사 창건공사 재개와 불교의 공인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BR 본 연구에서는 신라 불교의 공인 시기를 발단과 실제적 공인, 법제 형식적 공인이라는 3단계의 중층적 구조로 설정하는 것을 제안해 보았다. 이 구조에 따르면 공인의 발단 시기는 법흥왕 14년(527)이고, 실제적 공인 시기는 법흥왕 22년(535)이고, 법제 형식적 공인 시기는 진흥왕 5년(544)이라고 할 것이다. 이 중 대표되는 공인 시기를 정한다면, 사서에 명확하게 근거가 기록된 진흥왕 5년(544)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료가 발굴되고, 나아가 관련 연구가 더 진척되어 법흥왕 22년(535)의 흥륜사 창건공사의 재개와 귀족세력과의 타협 관계가 보다 더 자세히 밝혀진다면 공인과 관련한 대표 연대는 새롭게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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