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연구는 16~17세기 통신사행을 통해 이루어진 서예문화 교류의 구체적 내용과 유존되고 있는 관련 유물들의 예술성을 확인하였으며 통신사행에 있어 서예문화 교류가 갖는 여러 의의를 고찰하였다.BR 일본 내란 등의 이유로 100여 년간 통신사 파견이 중단되었으나 1590년 사행이 재개되었고, 이후 1596년, 1607년, 1617년, 1624년, 1636년, 1655년, 1682년에 사행이 전개되었다. 1607년과 1617년, 1624년의 사행은 피로인 쇄환이라는 주목적과 임란 직후라는 시대적 상황 등에 의해 확인되는 서예문화 교류 관련 기록과 유물의 수가 적다. 그러나 1636년 사행 이후로는 그 수와 범위가 점차 증대되고 확대되었다.BR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부터 승려, 도주, 쇼군, 천황까지 많은 계층의 일본인들이 사행원들에게 시문서화를 요청하였고, 사행원들은 당시 주요 예물이었던 문방사우를 선물하였다. 한편 사행 횟수가 누적될수록 어필 편액과 범종 등을 선물하거나 문자학 관련 토론을 진행하는 등 교류가 점차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원인이 조선의 내외적 정세 및 대일인식의 변화와 유관하다 보았다.BR 교류의 결정체인 유물은 현재까지도 유존되고 있으며 그 종류는 어필을 포함한 묵서, 현판 편액, 회화 등이다. 예술적 가치가 있으며 당시 조선의 서예흐름과 일본인들의 심미취향을 반영한다. 현재는 단순한 유물적 가치를 넘어 문화교류사 연구의 사료이자 상호 긍정적 관계의 유지 및 발전을 위한 연결고리로 활용되고 있다. 이에 통신사행에서의 서예문화 교류와 결과물로서의 유물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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