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필자는 『시경』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을 『시경』에 수록된 개별 작품들을 우리 문단에서 어떻게 수용・활용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는 방법으로 찾고자 하는 데, 이 논문은 그 두 번째 시도에 해당된다. <鹿鳴>은 『시경』 <大序>에서 ‘四始’ 중 하나로 거론 된 「小雅」의 첫 번째 작품 이다. 주인이 손님을 맞이해서 연회를 베푸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는 춘추전국시 대에 이미 공식연회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禮記補註』 등 여러 『禮記』류 서적을 보면 <녹명>이 손님을 대접할 때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남 아 있다. <녹명>은 산문 문체 중 表箋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었는데, 대체로 ‘이번 연회는 <녹명>과 같이 아름다운 잔치’라는 점을 강조할 때 사용되거나, 자신이 <녹명>시와 같은 아름다운 잔치의 손님이나 신하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겸사로 사용되었다. 序 跋에서는 대체로 <녹명>을 가지고 鄕試나 대과에 급제한 것을 비유한 내용들이 많 았는데, 특히 정조는 <녹명>의 구절인 ‘我有嘉賓’을 새긴 은 술잔을 성균관 유생들 에게 하사하고 지은 <太學恩杯詩序>에서 그들이 ‘아름다운 손님[嘉賓]’으로 성장해 서 나라에 큰 보탬이 되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조선은 태종 초기부터 고려 말의 음악에서 벗어나 바른 음악을 사용하자는 취지 에서 『시경』 <녹명>등을 공식연회에서 사용해왔고, 세종조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만든 우리의 노래를 연회에 사용하기도 했다. 중종 무렵에는 연회 음 악이 상당부분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조대에 와서는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으로 보인다. <녹명>과 관련된 실록류의 이러한 흐름 이외에도, <녹명>을 언급하고 있는 46건 의 실록류 기록 중에 임금이 참여한 朝講이나 晝講에서 <녹명>의 의미가 거론된 것 이 11차례에 이르고, 이외에 군신 간의 대화에서 언급된 <녹명>도 대부분 <녹명>이 담고 있는 주제인 ‘주인과 손님의 調和’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君臣의 화 합’을 이루어야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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