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석비는 후한시기에 기본적 외관을 갖추게 되는데, 이때 석비는 서사매체로서 당시 가장 중요한 서사매체인 목간의 형태를 본따 외관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 ‘視覺 文書’인 표찰 목간의 형태를 본따게 되었는데, 문서의 제목 및 간략한 내용이 적혔던 표찰 목간과 석비의 비문이 동일한 기능을 가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표찰 목간은 윗부분에 둥그런 모양을 하고 그 둥그런 부분에 그물망과 같은 사선 격자문양을 칠하며 끈을 묶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석비는 이를 따라 윗부분에 비수를 만들고 그 비수에 暈紋이나 龍虎 등의 장식을 하고 둥그런 비천을 題額 아래에 뚫게 되었다. 한편 맹서문에 신령이 강림할 수 있도록 규형이 사용되었던 서사 전통을 이어, 석비의 비수도 비문의 내용을 다짐하고 약속하는 맹서의 의식을 위해 신령의 강림을 뜻하는 규형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중대한 일을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게시함으로써 권위를 높이려는 석주형 사면비도 건립되었다. 이처럼 석비는 서사재료로서의 기능이 먼저 고려되어 ‘시각 목간’의 형태를 계승하며 석비의 기본적 외관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석비 중에서도 묘주의 升仙을 희구하는 묘비가 특히 유행하면서 그에 적합한 장식적 요소가 다시 추가되었다. 사후에 龍舟를 타고 천상의 세계로 승선하는 관념을 묘비에 표현하였다. 비수는 하늘의 세계로, 비좌는 지하의 세계, 그리고 비천은 생명의 상징인 옥벽으로 비정되었던 것이다. 석비의 외관은 목간이 갖고 있는 시각적 효과를 그대로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승선이라는 관념까지를 담기까지 이르렀다. 이 점에서 ‘시각 목간’을 이은 ‘시각 석비’가 탄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BR 집안고구려비와 광개토왕비는 이러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시각 석각’ 문화 위에서 선택되었다. 왕릉 옆에 세울 석비였기에 더욱 더 석비의 목적에 적합한 석비의 형태를 고려하고 신중히 선택했을 것이다. 집안고구려비는 석비에 신령이 강림할 수 있도록 圭形 비수가 선택되었으며, 광개토왕비는 중요한 敎令을 많은 사람에게 게시함으로써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시행 효과도 증진시키기 위해 석주형 사면비가 선택되었다. 즉 후한 이래 석비문화를 숙지하고 있었던 고구려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碑形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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