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전통적으로 단오에 행해지는 의례들은 한국의 근대화과정, 국가의 공휴일 정책의 변화로 인해 대부분 변화되거나 소멸되었다. 특히, 농업의 세시주기에 의존하는 농촌의 농민들과는 달리 다양한 생업을 가지고 있는 도시의 도시민들에게 일상의 세시주기는 국가의 시간정책에 의해 크게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단오에는 많은 의례가 행해졌다고 기록되는데, 일제강점기 서울(경성)에서 단오는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세시의례와 놀이가 행해져왔으며, 도시의 지역축제로서 점차 발전되어갔다. 지금은 음력 오월 오일인 단오가 전통적인 세시풍속으로서의 위치를 많이 상실했으나, 한국의 4대명절 중의 하나인 단오는 일제강점기에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자리매김해갔으며, 일제강점기의 각 시기별로 지속과 변화를 겪어왔다. 본고에서는 식민지라는 상황속에서도 고래로부터 이어온 전통적인 세시풍속으로서 단오를 지켜온 서울(경성)인들의 단오날의 풍경을 당시의 신문, 잡지들 중 세시풍속 관련 기사가 가장 많이 게재되었던 『매일신보』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의 단오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는데, 1925년부터 1933년까지는 단오 지역축제의 절정기로 전국에서 크고 작은 지역축제가 활발히 개최되었다. 먼저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기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경성의 단오는 남묘와 동묘를 중심으로 그네뛰기와 씨름대회가 개최되었고, 창포물에 머리를 감거나 단오빔을 입고 참배를 하는 등 세시의례가 행해지는 세시명절로서 기능하였다. 1920년대의 문화정치기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한국어 신문 발행이 허가되면서 조선의 전통 세시명절인 음력 단오절의 각종 행사와 축제들이 매년 보도되었고, 단오 관련 행사는 각종 신문사나 각 지역의 여러 단체들로부터 후원을 받거나 주최가 되어 개최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과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음력 단오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증가되기 시작하였고,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밴 1940년대의 경성에서 단오는 더 이상 지역축제로서 기능하지 못하였고, 쇠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1941년부터 1945년까지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단오축제가 중단될 수밖에 없었으나 1940년까지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음력 단오절을 맞이하여 씨름대회와 그네뛰기대회를 포함한 각종 크고 작은 세시 행사들이 꾸준히 개최되었고, 경성인들에게 음력 단오는 중요한 세시명절이자 지역축제로 인식되어 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Full Text
Paper version not known

Talk to us

Join us for a 30 min session where you can share your feedback and ask us any queries you have

Schedule a call

Disclaimer: All third-party content on this website/platform is and will remain the property of their respective owners and is provided on "as is" basis without any warranties, express or implied. Use of third-party content does not indicate any affiliation, sponsorship with or endorsement by them. Any references to third-party content is to identify the corresponding services and shall be considered fair use under The CopyrightL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