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한 해의 시작인 설날은 세시풍속의 시작점으로 한국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세시풍속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설날이 지금처럼 양력설과 음력설로 나뉘어 양쪽 모두 공휴일로 인정되고, 음력설이 부정적인 의미의 ‘구정(舊正)’이 아닌 공식적인 의미의 ‘설날’로 달력에 표기되기까지 많은 혼란과 갈등이 있었다.BR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조선인들은 음력설을 지내왔다. “음력설은 조선인의 설, 양력설은 일본인의 설”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들릴 정도로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는 ‘북촌’과 ‘남촌’이라는 분리된 두 장소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기 다른 설 명절을 쇠는 이분화된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경성 시민들이 양력설과 음력설을 실제로 어떻게 지냈는지, 양력설과 음력설을 지내는 대중을 향한 언론의 입장과 논조는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당시의 신문과 잡지의 기사 분석, 서울 토박이들의 현지조사 면담 자료를 통해 살펴보았다.BR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은 식민지라는 상황하에서 대외적으로는 양력설을 긍정하고 음력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해야 했으나 간접적으로는 북촌의 활기찬 음력설 풍경을 묘사하면서 음력설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양력설을 강조하고 이중과세(二重過歲)를 비난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음력설만이 우리의 설”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도 당시의 여러 신문 기사들의 내용, 서울 토박이들과의 면담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BR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되었던 이중과세(二重過歲)의 폐해에 대한 지적과 양력과세를 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논설류의 기사들은 양력과세를 서구의 근대화와 연결짓고자 하였다. 서구의 근대화는 일본이 앞서 도입한 것으로, 우리도 이에 따라야 한다는 식의 논리에는 ‘식민지적 근대성’이 전제되어 있었으며, 이는 ‘양력’이라는 근대 달력의 도입과 함께 일상생활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음력설과 양력설을 두고 나타난 이러한 대립은 일제강점기의 경성에서 조선인의 공간인 ‘북촌’과 일본인의 공간인 ‘남촌’이라는 구분된 두 장소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공간적 이분화와 ‘구별짓기’는 음력설과 양력설이라는 대조적 의미를 지닌 세시풍속과 맞물려 상당히 대조적인 풍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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