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조선 개국 직후 한양 신도시의 역사(役事)에는 일반인 뿐 아니라 승려들[僧徒]도 동원되었다. 조선 초 승려들에게는 국가에서 도첩(度牒)을 발급하도록 되어 있었고, 도첩을 발급받기 위하여 승려는 자신의 평생 신역(身役) 즉 군역(軍役) 값에 해당하는 정전(丁錢)을 납부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도첩을 발급받은 승려들은 공도승(公度僧)으로 인정되어 그 신분이 국가로부터 불교 교단으로 이양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국가로부터 ‘승려’라고 불리는 이들은 국가가 요구하는 부역(負役)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고, 정전의 납부를 대신하는 등의 명목으로 입역(入役)할 때에도 그의 승역(僧役)은 신역/군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한양 신도시의 역사에 동원된 일반인의 사례를 볼 때, 여기에서 승려들에게 부과되었던 승역은 신역/군역과 다르게 일반 정부(丁夫)에게 부과되는 또 다른 역(役)의 형태인 요역(徭役)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승려들이 한양의 토목공사 외에도 중앙과 지방에서의 각종 공공건물의 영선수즙(營繕修葺), 사신(使臣)에 대한 지대(支待) 등에 동원된 사례 또한 이들이 요역과 같은 역역에 종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역(僧役)의 차출 담당자와 차정 방식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료가 남아 있지 않으나, 일반인 요역의 사례에 비추어 볼 때 승역의 인원은 지방관청의 행정 체계를 통하여 징발되었으며, 그 차정의 기준 또한 일반인의 요역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찰의 규모 즉 재산 정도 및 소속 승려의 수에 따라 차등 징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도첩제도로 대표되는 교단 소속 인원의 군역 면제 원칙과 배치되지 않는 것이었다. 도첩을 지니지 않은 승려를 추쇄할 경우 즉시 환속시키고 군역을 차정한다는 《실록》의 여러 기사는 도첩 발급 시에 지불하는 정전이 승려 지원자의 평생 신역 값에 해당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이에 따라 승역은, 특히 토목공사 같은 데에 동원된 것일 경우, 군역 즉 신역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게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세종 때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승역급첩(僧役給牒)의 예는 승역을 군역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그러한 시각을 더욱 강화한다. 하지만 도첩 발급과 정전 납부의 원칙이 세워져 있던 조선 초의 상황에서, 명백히 승려라고 지칭되는 이들이 각종 승역에 그것도 대부분 요역의 종목임이 분명한 노동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은 분명 재고할만한 지점이다. 기존에 승역을 요역의 관점에서 파악한 연구는 거의 없었으며, 그런 점에서 본 연구의 문제의식은 다소 도발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조선시대 승역의 이해에 하나의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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