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에서는 장초금과 관련된 여러 사료들을 분석하여, 『한원』 편찬까지의 생애와 중앙정계 진출 후 관인으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파악한 후, 양자의 관계를 검토해 보았다. 장초금은 병주 기현에서 유가적 윤리에 충실한 품행을 보이는 가문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하여, 17세 때 병주도독 이적에 의해 향공진사로 추천되어 과거에 합격하였고, 660년에 태원현령으로 재직하면서 복고적인 성격의 유가적 윤리에 충실하려는 목적에서 『한원』을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670년대에 형부시랑으로 재직하면서 676년 8월에는 토번의 침입에 대한 득실을 간언하고 율과 격식의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680년대에는 이부시랑‧사형경‧추관상서와 같은 요직에 재직하였는데, 사형경 재직시기로 추정되는 686년 경에는 무고사건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측천무후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혹리 주흥이 서경업의 반란에 연루되었다고 무고한 것으로 인해 689년 8월에 유배되었다가 690년 8월에 사망하였다. 이 사망과정과 관련해서는 표면적으로는 이적과의 인연이 빌미가 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무고사건의 해결을 통해 측천무후의 정치적 행보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 실질적 원인이었다고 추정되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690년 무주 정권의 성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689년 경에 이용가치가 떨어진 복고적 유가 관련 관인들의 숙청과정에 그도 희생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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