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인도불교가 중국에 도달한 것은 서기 기원 무렵이었다. 그러나 인도불교가 바로 漢族들에게 수용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은 인도불교에 필적하는 사상 종교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교나 도교 등이었다. 그러므로 漢族들은 인도불교를 구태여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작된 것이 고대 인도어로 기록된 엄청난 수의 불교경전을 중국어로 번역, 즉 漢譯한 사업이었다. 이렇게 하여 한역경전이 등장하였다. 한역에 관해서는 漢族들이 쉽게 수용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중국 사상을 가미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도불교는 대략 200년이라는 장기간을 걸쳐 중국문명과 융합하였다. 즉 동아시아 최대의 선진국인 중국문명의 틀인 漢字, 繪?, 彫刻, 工藝, 建築, 土木鑄造技法 등으로 감싸여, 인도불교는 모양새를 새롭게 중국불교, 중국불교미술로 변신하였다. 이와 같이 고도한 문명국이 마찬가지로 고도한 異文明을 수용할 경우, 시간을 걸어서 異文明을 自國의 문명과 융합시키면서 수용하는 것이다. 중국불교는 동아시아의 하이 컬처(상위문화)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주변 한반도나 일본열도에서의 수용은 단기간에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漢나라가 서기 220년에 멸망하자 곧이어 天下는 三分되어, 나아가 五胡十六國의 동란시대가 시작하였다. 長安 귀족이나 관료, 민중들은 難民이 되었고, 甘肅의 河西지역 前?에 도망갔으나, 그들 중에는 長安의 화가나 조각가가 있었다. 그들이 敦煌莫高窟의 絢爛한 벽화와 화려한 塑像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석굴을 조영하기 위해서는 고도한 기술과 창조력을 보유한 漢族 전통문화를 체득한 화가나 조각가를 포함한 工人集團을 안고 있었던 유력자들이 敦煌에는 있었다. 다시 말하면 중원 극상의 미술이 敦煌에 移轉하였던 것이다. 異文明의 수용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 莫高窟 257窟 (北魏)과 428窟 (北周)에 있다. 전자의 남벽 중앙 벽면에는 千佛 가운데 하나의 건물이 그려져 있다. 중국 전통 瓦葺의 목조건축이며, 大棟 양단에는 ?尾를 두고, 大棟 중앙부에는 인도불교의 스투파와 그 위에는 相輪을 그리고, 좌우에는 한 장씩 幡을 휘날린다. 건물내에는 중앙에 如來像이 冕服 같은 大衣를 입고, 蓮華座上에 서며, 죄우에는 脇侍菩薩像이 선다. 三尊像 앞에는 처마 밑에서 帳이 걸어져 있다. 漢族 전통 목조건축의 大棟에 인도불교 스투파를 기재하는 대담한 조합이야 말로 異文明을 자국의 문명으로 감싸는 漢族의 왕성한 창작 의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건물은 불사리 안치의 불탑(스투파)과 불상안치의 불전(금당)이 중국건축에서는 아직 미분화였던 무렵의 상황을 전하는 귀중한 회화자료이기도 한다. 후자의 428窟 서벽 중앙 남쪽의 佛塔圖는 불탑이므로 신성하고 귀중하면 할수록 높이가 요구되어, 건축은 單層에서 多層으로 고도화한다. 벽화는 小塔 네 개와 그들에 둘러싸인 大搭으로, 소탑은 모두 三層, 대탑은 정확하지 않지만 고도화의 과정이라 여겨지며, 곧 漢族들이 좋아하는 陽數, 즉 三重, 五重, 七重, 九重塔이 등장한다. 이와 같이 敦煌莫高窟에는 漢族들이 異文明인 인도불교를 중국화하면서 수용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귀중한 회화자료가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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