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논문은 16세기에 건립된 방촌(厖村) 황희(1363~1452)의 제향처인 상주 백옥동영당의 건립과 운영 및 승원 과정을 검토하였다. 백옥동영당은 ‘백화당(白華堂)’에서 출발하여 1580년 황희의 5대손 황돈(黃惇, 1510~?)의 주도로 건립한 사우이다. 그러나 영당은 임진왜란기 전소되었고, 1595년(선조 28) 우복 정경세의 제자이자 황희의 7대손인 황뉴(黃紐, 1578~1626)의 주도로 재건되었다. 서원으로 승격 전 영당은 상주 입향조인 황보신(黃保身, 1401~1456)의 후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황보신이 상주로 낙향하면서 자신의 백화당에 황희 영정을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한편, 백화당을 문중 회합 장소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황보신의 후손들이 과거급제 및 사환을 통해 상주 향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당은 향내 사족들의 공적 장소로 활용되면서 그 규모도 확장되었다. 18세기 초반에. 상주 근암서원에서 개최한 도회에서 사서(沙西) 전식(全湜, 1563~1642)을 배향하여 승원하자는 공론이 처음으로 취합되었으나 실패하게 된다. 그로부터 12년 후 근암서원 원장 전수장(全守長)의 주도로 2차 발의가 시도되었고, 이어 상주 충렬사 재회(齋會)에서 3차 발의 후 상주 전 사림의 공론이 취합되어 1714년 11월 19일 ‘옥동서원 (玉洞書院)’으로 승원하였다. 옥동서원의 승원은 18세기 초반 집권당의 영남 남인 강경책에 대응할 한 방편으로 백옥동영당의 승원을 두고 상주 향촌 사회의 남인 세력과 향론을 결집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Full Text
Paper version not known

Talk to us

Join us for a 30 min session where you can share your feedback and ask us any queries you have

Schedule a call

Disclaimer: All third-party content on this website/platform is and will remain the property of their respective owners and is provided on "as is" basis without any warranties, express or implied. Use of third-party content does not indicate any affiliation, sponsorship with or endorsement by them. Any references to third-party content is to identify the corresponding services and shall be considered fair use under The CopyrightL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