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영규(靈圭, ?-1592)는 조선후기 역사서에 불승(佛僧)이며, 임진왜란 때 승장(僧將)으로 활약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의병장 조헌(趙憲)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고, 금산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영규의 이러한 행적은 세월이 흐르면서 사대부들의 시문에 ‘순국(殉國)의 승장’으로 칭송되거나 ‘충렬(忠烈)의 의인(義人)’,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지사인인(志士仁人)’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보살의 면모를 지닌 불승이었다. 사대부들이 영규를 ‘순국의 승장’이나 ‘충렬의 의인’으로 부각시킨 것은 불승다운 그의 정체성을 흐리게 한 것이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영규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순국의 승장’으로 형상화한 것은 그들이 영규와 임진왜란을 함께 겪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예는 임진왜란을 겪고 17세기 초까지 살았던 조위한, 이해수, 구사맹 등의 시에서 볼 수 있다. 한편, 18-19세기 사대부들은 영규를 ‘충렬의 의인’, 또는 ‘지사인인’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들은 주로 정부가 편찬한 역사나 재야의 기록물을 통해서만 영규를 인식했다. 그것은 영규가 미처 자신의 어록이나 기록물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대부들은 영규의 인물됨을 평가하고 추상하는 데 크게 두 가지 시각을 보여준다. 하나는 유교적 이념에 따른 시각, 곧 ‘묵명이유행론(墨名而儒行論:겉모습은 불승이나 속마음에 따른 행동은 유자이다)’의 관점을 고수하여 영규를 유교적 인간상 안에 포괄하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유교적 척도에 따른 평가에 거리를 두고 영규의 실상과 진정을 보려고 하는 관점이다. 전자는 황경원, 정규한, 조인영 등의 글에서 볼 수 있고, 후자는, 이인상, 박지원, 성해응 등의 시문에서 볼 수 있다. 이상의 조선후기 유교지식인들의 영규에 대한 두 그룹의 인식과 형상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전자의 관점과 태도는 영규의 정체성 확인 작업에 다소 억지와 왜곡을 가져올 수 있는 점에서 경계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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