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香徒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김유신의 낭도를 미륵향도라고 한 사례이다. 이러한 향도를 역사학 분야에서는 주로 향촌(지연)공동체로 파악하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물론 향도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적인 성격이 더 두드러진 것으로 생각한다.<BR> 향도는 향을 매개로 한 신앙조직이다. 향은 초기에는 왕실과 귀족에게 독점되어 불교의식과 治病, 산천에 제사를 모실 때에만 사용되었다. 이러한 향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향도를 조직한 구성원들의 신분과 계층은 상층 지배층에서 중간 신분층과 민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김유신의 용화 향도 단계에서 신라통일기를 이어 고려중기까지는 향도를 주도한 사회계층은 상층 신분층과 토호층이었으며, 여기에 물론 다수의 민들이 동참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고려중기 이후 향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향도는 상당히 분화가 이루어져 민들도 독자적으로 향도를 결성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말에는 매향이 해안지역에 한정되긴 했지만 상당히 보편화되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말해준다.<BR> 물론 향도는 일차적으로 향을 매개로 한 신앙공동체로서 존재하였지만, 일부 상당히 큰 규모의 경우는 향도를 주도한 세력들이 지역공동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기에 그 지역을 통괄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향도의 본질적인 성격을 지역공동체와 연결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BR> 어떻든 향도는 불교의 신앙결사의 한 형태이며,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조직된 특징이 있다. 향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수행을 통해 解脫?涅槃에 이르는 것이었다. 아울러 향도는 造石?造像?造塔?造鐘 등 불교의 상징 조형물의 조성이라는 직접적인 목표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사업 추진을 위한 재원의 공동 마련이 핵심적 내용이었으며, 사찰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헌신적인 참여와 지원, 그리고 장기적인 念佛 수행의 계획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BR> 이러한 향도는 고려후기를 지나 여말선초에 이르면 불교가 퇴조함에 따라 향도의 성격이 변질된다. 이러한 중에 일부 도서와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민간신앙적 요소와 미륵신앙이 결합한 埋香 신앙이 유행하였다. 곧 신앙공동체로서 향도의 기능이 유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추세는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불교적인 요소를 탈각해가면서 본래부터 포용하고 있던 민간신앙만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곧 향도는 불교적인 요소는 사라지고 ‘祀神團體的’인 기능이나, 향촌사회의 상부상조하는 ‘契’의 성격을 갖는 존재로 변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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