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글은 조선시대 초기 분청사기 인화국화문이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문양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15세기 초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고려 13세기 인화기법 상감청자에서부터 이어진 것임을 밝혔다. 이를 위해 제작시기가 1202년 또는 1255년 이전인 明宗 智陵 출토 ‘청자상감여지문발’, 전북 부안 유천리 12호 가마 퇴적층 출토 상감청자, 1329년-1347년 사이의 간지명 상감청자, 1380년대에서 1420년대 사이에 운영된 가마터에서 출토된 자기의 문양을 분석하였다.<BR> 조선 초인 15세기 1/4분기에는 고려 말 상감청자의 두 계통인 상감기법과 인화기법으로 시문한 자기가 공존한다. 이는 1400-1420년 사이에 제작된 恭安府명자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418년이 하한인 敬承府명자기는 내외면 전체에 인화국화문이 빈틈없이 시문된 정형화된 특징을 보이는데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는 시점은 공납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시기, 공납용 자기제작에 견양(見樣)을 사용하는 시기, 그리고 경승부명분청사기의 하한시기를 기준으로 1414년에서 1418년 사이로 추정하였다. 또 경승부명 분청사기에 시문된 집단연권형 인화국화문을 통해 분청사기 집단연권인화문의 상한시기가 기존에 알려진 1424년 이전 보다 빠른 1418년 이전임도 밝혔다.<BR> 경승부명분청사기를 통해 확인한 조선 초 분청사기 인화국화문은 국가의 통치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일원화된 행정체계를 바탕으로 고려와는 다른 수취체제를 배경으로 공납용 자기를 제작한 조선시대 도자문화의 독자성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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