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연구는 태종과 세종대 불교 탄압시책 이전인 조선 건국초 왕사 무학의 興法과 奠都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무학은 이성계의 탄신일에 왕사로 책봉되어 그의 스승 지공이 터를 잡고 스승 나옹과 함께 흥법하고자 했던 양주 회암사에 머물렀다. 무학은 회암사에서 태조의 권유에 따라 계룡산의 지세를 살피는데 동행하였으나 “능히 알 수 없다.”고 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회암사로 돌아왔다. 무학은 그 후 1년여 동안 고려의 국도였던 개성에 머물면서 고려말 숭유억불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연복사의 탑을 낙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이 희사해 지은 개성 광명사에서 불사를 주관하는 등 흥법을 펼쳤다. 이는 후에 이성계로 하여금 흥덕사를 한양에 창건하게 하였다고 생각되며, 흥덕사는 교종의 도회소가 되기에 이른다. 그런 후 양주 회암사로 가서 스승 지공과 나옹의 탑명을 새기고 불교계의 조파를 새롭게 확정하여 『불조종파지도』를 편찬하였다. 이렇듯 무학은 나옹을 중심으로 하는 법계를 정립하여 불교계의 재편을 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 후 국도 후보 터가 제기되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후보지인 고려의 남경 터나 그 일대인 무악과 한양의 지세를 살피는데 참여하였다. 무악의 지세를 살필 때 무학의 의견은 알려진 바 없으나 남경의 터에서는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면서도 신료들의 의견을 따라 결정하라고 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이성계가 무학에게 “세상 사람들의 터 잡는 것이 도사의 눈만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무학은 계룡산과 한양 등 국도 후보지의 지세를 살필 때 이성계와 함께 하였다. 이렇듯 무학은 한양을 국도를 선정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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