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은 서구 근대 역사학의 도입 이후 한국에서 나타난 ‘랑케 현상’의 원인과 특징적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실증사가’로 고착된 랑케의 이미지를 수정하고자 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에서 이루어진 랑케 역사학의 수용은 ‘실증사학의 비조’라는 조야한 랑케 이미지가 그의 저작들에 대한 독서와 해석의 축적을 통해 수정되어 온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길은 결코 단선적이거나 지속적인 진보의 과정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학계는 메이지유신 이후 한 세대 동안 일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랑케를 그저 ‘실증사가’로서 받아들였다. 해방 이후에도 한 세대 동안 한국 역사가들의 랑케 이미지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일부 역사가들이 긍정적 의미에서 랑케를 실증사학의 표상으로 받아들였던 데 반해, 또 다른 일부 역사가들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랑케를 식민사관의 운반체(vehicle)로 활용된 실증사학의 개창자로 간주했다. 양측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랑케 역사학의 내용이 아니라 학문 권력의 기호로서 랑케의 명성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1970년대에 와서야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양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다면적인 랑케 역사학의 면모가 확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학계 안팎에 널리 유포된 실증사가로서 랑케의 이미지가 사라지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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