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1890년 비스마르크의 좌천 이후 빌헬름 2세는 유럽 이외에도 국제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나아가 제국주의 완성을 위한 ‘신항로(Neure Kurs)정책’ 의 새로운 시작을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에서 시작했다. 이러한 시작은 알프 레드 티르피츠Alfred Tirpitz가 프리드리히 폰 홀만Friedrich von Hollmann의 뒤를 이으며 독일해군의 새로운 발전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1897년 해군성 최고 책임자가 되면서 빌헬름 2세의 야심을 현실로 옮긴 인물 이었다. 티리피츠는 낙후한 독일 해군력을 새롭게 개편하기 위해 1889년 영국의 해군력 강화 법Naval Defence Act과 미국의 해군전략가 알프레드 마한Alfred T. Mahan을 참고한다. 이를 바탕으로 티르피츠는 교주만을 점령함으로서 의회 내 해군력 강화의 필요성 설득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그동안 진행되었던 독일 해군력의 발전을 실험해 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독일 해군이 교주만에 조차한 사건의 근본적인 배경에는 삼국간섭과 삼국협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빌헬름 2세와 독일 해군은 당시 북해상의 위기와 청도지역의 불안정한 상황을 독일제군의 실질적인 위기로 파악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위기와 불안정을 확대 재생산시킴으로써 그 자체를 국내의 많은 저항세력을 회유하고 무력화시키기 위한 선전선동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티르피츠의 선전선동활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시기가 수차례에 걸친 함대법 개정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것은 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새로운 함대법 을 안정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티르피츠는 자신의 계획 Tirpitz-Plan 속에 이미 담고 있었고, 북해에서 영국과의 긴장과 교주만의 위기는 그러한 계획의 중심에 있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폴커 베르그한Volker R. Berghahn은 1898년 두 번에 걸친 함대법 개정과 1900년의 함대법은 사실상 독일 식민지와 북해의 위기에 근거한 대중선동과 언론매체를 통한 선전의 결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의화단 사건이 열강들에 의해서 진압이 되고 국제질서는 또 다시 러·프·독 대 일·미·영의 대립구도로 재편되면서 영일동맹(1902) 은 대립을 넘어 전쟁을 향해가고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중립국 선언을 했던 미국과 영국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앞에서 서술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의화단 이후 본격화된 서구열강의 반목은 해군력을 중심으로 물리적 충돌의 구체적 모습을 띄고 있었다. 빌헬름 2세 또한 자신의 식민지 정책을 동아시아에서 시작했 고, 그것을 실현시킬 해군력강화를 위한 노력 도 동아시아에서 찾았다. 따라서 서구 열강의 해군력 강화의 배경에는 빌헬름 2세와 티르피츠의 교주만 전략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Expert naval opinions presented to german Parliament in December 1888 and February 1889 rendered critical views on the state of the navy. The develop of the Russian and French navies was another factor pointing to purported British weakness. as the final outcome, public support for proposed naval growth grew and placed further pressure on Parliament to support the act. The Kaiser had wanted a large naval force to ensure Germany of what he called ”a place in the sun”. A large German navy could assist in German try to attain colonies, furthermore further the country’s economic interests everywhere in the world. He was brighten to make his country a colonial power in the Pacific. He wished to augment the strength of the German armed forces; in particular he wanted to develop a navy that could match the British Royal Navy. But a global policy without global military influence appeared unworkable, so a navy was built. This fleet was supposed to give German interests emphasis during peace and to protect the German trade routes and obstruct hostile ones during war. A network of global naval bases was a key requirement for this intention. When the German Emperor final to take over the supreme command of the Navy himself on 14 March 1899, the Imperial Naval High Command was deconstruct. This happened mostly at the demagog of Admiral Alfred von Tirpitz, to increase the power of his Imperial Naval Office. Some of the powers of the Imperial Naval High Command were appointed to the before existing Admiralty Staff. In 1860, a Germany expeditionary fleet arrived in Asia and explored the region around Jiaozhou Bay. The following year the Germany-Chinese Treaty of Peking was signed. In 1896 Rear Admiral Alfred von Tirpitz, at that time commander of the East Asian Cruiser Division, examined the area personally moreover three extra sites in China for the establishment of a naval base. Rear Admiral Otto von Diederichs replaced Tirpitz in East Asia and focused on Jiaozhou Bay even though the Berlin admiralty had not formally decided on a base location.

Talk to us

Join us for a 30 min session where you can share your feedback and ask us any queries you have

Schedule a call

Disclaimer: All third-party content on this website/platform is and will remain the property of their respective owners and is provided on "as is" basis without any warranties, express or implied. Use of third-party content does not indicate any affiliation, sponsorship with or endorsement by them. Any references to third-party content is to identify the corresponding services and shall be considered fair use under The CopyrightL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