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오키나와에는 19세기 후반까지 중국적 세계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비무장의 섬’으로서 독특한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던 유구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구왕국은 19세기의 위기상황 속에서 일본의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말았다. 유구병합에 관한 일본 측 연구는 상당히 많이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한반도 정황과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는 시각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본 연구는 유구왕국의 해체가 동아시아 질서가 변동하는 과정에서 특히 한반도 ‘안과 밖’의 정치적 상황 변화와 어떻게 맞물리게 되는지 고찰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BR> 중국적 세계질서의 변동은 아편전쟁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삼국 간의 구체적인 관계 변동은 메이지 유신이라는 일본 국내의 정치변동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메이지 신정부는 중국적 세계질서의 가장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유구왕국을 기점으로 거대한 전환기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을 모색하게 된다. 1870년대 일본에 의한 유구왕국의 해체과정은 몇 차례의 단계를 거치면서 치밀하게 진행되었으며, 예측 가능한 반발과 갈등의 소지는 가급적 사전에 봉쇄되었다. 메이지정부는 ‘국제적’ 분쟁으로 비화할 수밖에 없는 유구문제를 교묘하게 ‘내정’ 개혁의 문제 혹은 ‘지방’ 제도의 개혁문제로 환원시켜 가면서 분쟁의 여지를 애매하게 흐리게 하는 방식으로 유구를 병합해 나갔다. 일본에 의한 유구병합은 19세기의 거대한 전환기 동아시아 국가간 권력정치양상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대 사건으로서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근간에서부터 변동하였으며 아울러 더욱 큰 폭으로 변화할 것임을 시사 해주는 국제정치적 사건이었다.<BR> 이러한 일본의 유구병합 과정은 중국 측의 위기의식을 급격하게 심화시켜 놓았다. 이에 따른 중국의 위기감의 증대는 조선에 대한 간섭과 압박의 심화, 즉 기존의 전통적인 한중 양국관계의 변질로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의 유구병합이후 나타난 중국 측 위정자들의 권고와 자기 내부의 문건들에는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 패러다임이 근간에서부터 동요되고 있으며, 조선은 향후 동아시아 국가 ‘간’ 패러다임 변환의 핵심적 이슈가 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조선에 대한 압박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다.<BR> 이후 동아시아 갈등의 축은 본격적으로 ‘조선문제’로 이전되게 된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유구병합의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제국주의적 시대상황에서 구미열강-중국-일본이라는 삼중적 압박에 놓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라 국내적으로는 정책결정자들의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이에 대한 해법을 놓고 정치적 모색과 갈등이 급격하게 상호 상승하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1870년대 진행된 유구병합과 1880년대 나타난 조선정부의 개혁추진, 그리고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조선문제’가 부상하게 되는 과정이 마치 하나의 도미노처럼 긴밀히 맞물려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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