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발행된 세 점의 조감도를 소재로 1930년대 인천에 관한 심상지리와 인천부(仁川府)의 시가지 계획을 살펴보았다. 세 점의 조감도는 피사체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보다 어느 특정부분을 강조하거나 변형시켜 표현하는 데포르메 기법을 사용해 도시 경관을 재현함으로써 실제 모습과 비교해 적지 않은 ‘변형’과 ‘왜곡’을 낳았다. 그런데 이 같은 왜곡이야말로 1930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대인천’ 건설에 관한 인천부와 관련 주체의 이해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BR 먼저 1929년 조선박람회 개최 당시 인천협찬회에서 발행한 「인천명소도회」는 조선인 거주지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배제하는 대신 옛 개항장 일대의 일본식 시가지를 중심에 놓고 재현함으로써 경성을 방문할 내지의 일본인 관람객에게 인천을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도시로 선전하는 효과를 유발했다. 이에 반해 1935년 인천부에서 발행한 「관광의 인천항」은 나가이 인천부윤 취임이후 ‘상업 인천’, ‘관광 인천’과 함께 ‘공업 인천’이라는 장래의 시정방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이었다. 조감도는 인천부 내외의 각종 공업시설물과 함께 공사 중이거나 계획 중인 공공건축물을 담아 대인천 건설을 위한 ‘공업 인천’의 부시를 가시화했다. 한편 1937년에 발간된 「경승의 인천」은 1936년에 실시된 인천부 행정구역 개편 및 시가지계획을 일반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자 작성된 것이었다. 인천부는 부역 확장에 따라 새롭게 편입된 문학권 일대의 지역 개발을 추동해나갈 송도유원지사업을 일반에 홍보하기 위해 문학산 일대의 산업도로와 송도유원지를 상세히 조감도에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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