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조선시대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던 대로 중 경기북부와 강원도, 함경도 일대를 가장 빠르게 연결하는 경흥로는 지형적인 특징으로 큰 峻嶺 없이 지방 군현을 연결하며 상호 소통하는 통로였다. 경흥로변의 전통적인 취락 형태는 원삼국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개간이 쉽고 농업활동을 경영하기 편리한 하천과 충적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후 하천 범람의 위험을 피하고 군집생활이 가능한 구릉지로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이후 중앙집권적 지배체계가 확립되면서 지방 행정기관과 연결하기 위해 대로와 인접해읍치를 설치하며 취락지가 형성되었다. 경흥로 상의 읍치는 풍수사상이 반영되었으며, 북방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북쪽에 진산 및 主城을 두고 남쪽에 하천을 둔 전형적인 배신임수의 형태를 보이며 군집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경흥로변에도 교통과 통신을 보조하기 위해 역원이 설치되었다. 역원은 관영 시설로 역촌과 원촌으로 구성된 관설 취락을 형성하였지만 재정이 궁핍해지고 전란으로 시설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 복구되지 못하고 폐허로 남게 되었다. 조선후기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역원이 있던 자리나 도로의 결절점을 중심으로 사설 시설인 점막이 자리하게 되었다. 점막은 이동의 편리를 제공하면서 물류 유통이 확대되자 場市로까지 발전하였다. 경흥로 상에는 양주의 누원점, 포천의 송우점, 장거리점이 촌락을 이루며 형성되었는데, 그중 누원점과 송우점은 도고상업을 주도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다. 점막은 인구가 증가하면서 상업종사자가 늘어나며 도로를 중심으로 街村을 형성하는 상업취락이 조성되었다. 특히 포천 송우점의 경우 지역 전체 상업종사자 수의 35%가 밀집해 거주하는 대규모 집단 취락을 형성하였다. 이처럼 대로가 기지고 있는 교통의 편리성과 직업군의 변화로 거주지가 이동하면서 전통적인 集村인 읍치가 쇠퇴하게 되고 상업 취락이 지역의 중심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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