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논문은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의 문인 가운데 재경(在京)·관서(關西) 지역 문인의 활동과 그들의 존사(尊師) 의식을 바탕으로 전개된 추숭 사업을 살펴 본 것이다. 조호익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영남 지역에서 각광을 받았지만, 향촌을 무단(武斷)한다는 이유로 평안도 강동(江東)으로 전가사변(全家徙邊) 당하였다. 이후 장기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관서 일대에서 다수의 재경·관서 문인을 배출하고 관서부자(關西夫子)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의 재경 문인은 대체로 관서 지역에 부임한 지방관의 자제로서 어린 나이에 조호익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반면, 관서 문인은 향촌 내에서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춘 사족 가문 출신이었다. 재경 문인을 대표하는 인사로는 김육(金堉)·이시직(李時稷)·이정남(李井男)·이유성(李惟聖) 등이 있으며, 관서 문인 중에서는 박대덕(朴大德)·윤근(尹瑾)·홍덕휘(洪德輝)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재경·관서 문인의 특징 중 하나는 퇴계학파의 일반적인 재전(再傳) 문인 층과 달리 당색(黨色)과 학파에 구애되지 않고 두루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호익 사후 각종 추숭 사업에 상호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장현광(張顯光) 병향(並享) 논란, 성천(成川) 학령서원(鶴翎書院) 청액(請額) 과정에서 재경 문인 김육을 필두로 영천 및 관서 문인은 동일한 존사 의식을 바탕으로 추숭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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