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고구려의 왕릉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를 위한 무덤으로서 그 시대의 모범이 자 시대상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본 연구는 집안지역에 소재하는 무덤을 대상으로, 규모 및 출토유물의 검토를 통해 고구려의 왕릉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무덤을 선별한 후, 그 입지적 특징을 살펴봄으로 인해 고구려인들의 왕릉 조영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기존의 선행연 구들과 달리 잔존 최소길이를 중심으로 무덤의 크기를 파악해 보았다. 그 결 과, 집안지역에 소재한 거대 무덤 중에서 3세기 이후 단계의 고구려 왕릉은 그 외형적 크기가 적어도 40m이상인 적석총들을 왕릉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여기에 무덤의 내부시설이 가장 큰 장군총을 더한 총 9기를 집안지역에 소재 하는 고구려의 왕릉으로 확정할 수 있다. 기존에 이미 평양지역의 고구려 왕 릉으로 비정된 경신리1호 및 전(傳) 동명왕릉을 포함하더라도, 현 시점에서 고구려의 왕릉으로 볼 수 있는 무덤은 총11기에 지나지 않는다. 논란이 되고 있 는 우산992호나 우산2112호, 우산540호를 고구려의 왕릉으로 보기는 어렵고, 수릉(壽陵)제와 귀장설(歸葬說)에 입각해 26기에 이르는 대부분의 고구려 왕 릉이 집안지역에 존재한다는 견해는 인정할 수 없다. 집안지역에 있는 5곳의 고구려 무덤군 중에서도 고구려의 왕릉이 조성된 지역은 우산고분군・마선고분군・칠성산고분군에 한정되는데, 특히 엄선된 지 역을 중심으로 왕릉들이 위치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강화된 왕 권에 의한 한정된 지역의 독자적 공간 점유에 의한 결과로 파악된다. 한편, 고 구려인들은 왕릉의 입지조건으로 조망권의 확보를 중요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데, 이는 국내성을 축으로 동서로 이어지는 집안공로(集安公路)를 의식해 왕 릉이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상정된다. 본문에서 왕릉으로 비정한 집안지역 소 재 9기의 무덤들이 모두 집안공로에 인접해 있거나, 집안공로가 잘 조망되는 곳에 입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지역에서 평양지역으로 천도한 427년 이후의 고구려 왕릉은 모두 평 양지역과 그 주변 일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왕릉조영에 대한 의식의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제(葬祭)에 대한 개념이 새 롭게 재정립되었고, 이는 곧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으로의 묘제변화와도 연동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Full Text
Published version (Free)

Talk to us

Join us for a 30 min session where you can share your feedback and ask us any queries you have

Schedule a c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