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논문은 1947년 1월에 일어난 제 2의 반탁운동을 중심으로 당시의 한국 정치 지형을 살펴보았다. 1947년 초 하지는 미소공위 재개를 위한 서신을 공개했고, 이것은 잠복해 있던 반탁운동을 다시 재연시켰다. 1946년 반탁운동의 전위대였던 전국학생총연맹(All-Korean Student League)은 1월 18일 다시금 대규모의 투쟁을 계획했으나 이승만의 제지로 과격한 행동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1월 22일 당시 미군정에 의해서 만들어진 입법의원에서 44: 1로 반탁을 결의하였다. 이것으로 미군정이 추구하는 미소공위는 한국인들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부정된 것이다. 이같은 반탁운동은 우익에게 큰 힘을 제공하는 것인 동시에 좌익에게는 좌절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서 밝혀진 바는 다음과 같다. ① 미국의 신탁통치 계획은 당시 한국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② 반탁운동은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③ 비록 당시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지만 그의 외교력을 통한 지도력은 가장 강력했고, ④ 김구 역시 반탁운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지도력 경쟁에서 이승만과 비교할 수 없었고, ⑤ 김규식과 여운형은 미군정의 도움으로 좌우합작과 미소공위 재개를 지지했지만 독자적인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⑥ 당시 좌익은 미소공위를 지지하고, 더 나가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했으나 당시 한국사회의 주류와 거리가 멀었다. 1947년 초 남한의 정치지형은 하지를 중심으로 하는 미군정 세력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의 대립 구도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논쟁에서 미군정은 소련과 함께 한반도의 문제를 풀어보고자 하였지만 이승만 중심의 우익세력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는 전략을 세웠다. 당시 남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이승만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런 정치지형의 전개는 1948년 대한민국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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