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은 1945년 8.15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1945-48) 경상북도 대구의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현실 정치에 참여한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연구 기법으로는 지역사(local history) 및 미시사(micro history) 연구이며, 또 교회사를 일반 역사와 연계하여 연구하려는 작업이다. 1945년 8.15광복 직후에 경상북도 대구의 교회 지도자들은 -다른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과 달리- 일제 강점기 무너진 교회 재건에 착수하지 않고 사회의 치안질서 유지와 새 나라 건설에만 몰입했다. 그 이후에 이들은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우익 세력과 좌익 세력으로 나누어져서 활동했다. 그런데 양편은 좋은 관계 속에서 상호 협조적이었다. 8.15광복 이후의 정국을 미군정이 주도해 나갔다. 미군정의 정책은 좌익 세력 약화와 우익 세력 육성이었다. 미군정은 그해 11월에 남한을 반공주의 사회로 구축하고자 군대를 창설하고 경찰을 조직했다. 1946년 상반기에 대구에서는 -미군정의 우익 세력 육성에 힘입어- 우익 세력이 정치조직을 결성했다. 장로교회 백남채 장로는 우익의 정당인 한민당 대구지부 수석총무가 되었다. 1946년 10월에 일어난 ‘대구항쟁’ 기간에 좌익 세력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와 더불어 좌익에 속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의 세력도 와해되었다. 그 이후로 경찰과 극우 정치단체들이 좌익 세력을 혹심하게 억눌렀다. 지역의 우익 세력은 1948년 남한에서 단독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에 합류했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었다. 대구에서는 3개의 선거구(갑, 을, 병)에서 한민당 후보들이 당선되었다. 장로교회의 백남채 장로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전국의 국회의원 200명 가운데서 기독교인이 50명 정도(약 25%) 당선되었다.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국회개회식에서 이윤영 목사에게 개회기도를 요청했다. 그 이후로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대통령 이승만의 친미반공 정책과 그의 북진통일 노선에 대체로 협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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