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가곡문화사에서 ‘여창의 분화’는 19세기의 중요 키워드 중 하나이다. 그런데 19세기 초반 가집들에서 여창 작품들의 묶음이 나타난다고 하여 가집의 전반부는 남창, 후반부는 여창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18세기 가곡 향유 문화와 가집 편찬 방식이 19세기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남창과 여창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모아 가집에 수록하는 방식은 19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또한 여창이 19세기 가집에 특별히 별도로 묶여 수록되었다고 해서 18세기에 여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황진이와 같은 기생들의 작품과 연행 양상에 대한 기록은 여창 가곡이 진작부터 실연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황진이의 작품은 김천택 편 『청구영언』에 실린 이래로 오랜 기간 우조 초삭대엽으로 향유되었는데 이는 풍류 공간의 수많은 여기들이 불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삭대엽이 지닌 의미와 황진이의 명성이 더해져 여창 우조 초삭대엽의 작품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황진이의 작품을 여창 가곡으로 불렀 다는 기록은 『시가곡』(권순회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초 대표 가집인 『청구영언』(육당본)의 전반부를 살펴보면 동시기 가집인 『영언』(규장각본), 『가보』, 『흥비부』 및 19세기 후반 가곡원류계 가집에서 여창 가곡으로 향유된 경우를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여창으로 불렀을 가능성을 내포한 작품들인 것이다. 『청육』의 편찬 및 연행 집단과 관련있는 기생 명옥의 작품 역시 여창 가곡으로 향유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현행 가곡에서는 남창 으로만 부르는 ‘소용’을 기생이 불렀다는 <한양가>의 기록, 역시 현행 남창 가곡 으로만 부르는 삼삭대엽을 19세기에는 여창으로도 불렀음이 확인되는 고악보의 기록 등이 있다. 이 모든 논거들을 종합하면 『청육』 전반부 작품은 ‘남창’만이 아니라 남창과 여창으로 모두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을 의미한다. 또한 『청육』 후반부의 여창부는 여창이 분화했다기보다는 18세기에도 존재했던 여창 창곡들이 하나의 레퍼토리로 묶여 ‘여창 편가’가 생성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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