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동아시아 각국은 서양의학의 도입과정에서 질병인식과 의학인식에 기초하여 엄청난 병원공간의 변화를 경험했다. 특히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서양의학계는 미아즈마설에서 세균설을 거쳐 실험의학으로 나아가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고, 병원공간 역시도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홍콩 식민당국은 정부공립의원의 변화를 통해 유럽에서의 세균학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였다. 반면 동화의원은 개원 직후인 1872년 배치도와 개축이후인 1903년 배치도를 비교해 볼 때, 무려 30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공간구성과 배치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동화의원 설립부터 개조에 이르기까지 식민정부 내외에서 엄청난 논쟁과 대립이 있었던 것과 달리 배치도상에서는 수술실, 예방접종실, 전염병실 등 서양의학의 영향을 찾아볼 수 없다.<BR> 홍콩 페스트 유행 이후, 홍콩 도시사회가 급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화의원의 공간구성에서 세균설이나 실험의학의 영향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홍콩 페스트 방역을 주도했던 보건관료들의 위생인식과 관련이 있다. 홍콩 식민당국은 본국의 의학인식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19세기 홍콩의 위생관료들은 환경개선을 최상의 가치로 삼는 채드윅의 공중보건운동 이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식민당국의 보건관료들은 미아즈마설에 입각하여 동화의원을 폐쇄해야 한다는 주장만을 반복했으며, 세균학적 입장에서 병원공간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BR> 다른 하나는 중의병원으로서 동화의원의 태생적 한계와 동화의원의 서양의학 도입이 전면적이 아니라 절충적이었다는 점이다. 홍콩 페스트 유행 이후, 동화의원에 서양의학이 도입되었지만, 비용문제나 중국인들의 관습을 고려할 때 근대식 서양병원에서 중요한 공간이었던 수술실, 실험실, 접종실, 독립적인 전염병실을 갑작스럽게 설치하기는 어려웠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외과수술을 실시하고, 환자 분류를 통해 전염병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를 위해 동화의원은 서의를 고용하여 외과수술을 도입했고, 수증방 제도를 도입하여 전염병 관리에 신경을 썼다. 수증방 제도가 전염병 관리에 필요한 실험실과 검사장비의 부실을 근본적으로 만회할 수는 없었지만, 2차례에 걸친 진단으로 오진의 가능성을 줄이고자 했다는 점, 서양의학을 전면적으로 실시할 수 없었던 제한적인 환경에서 전염병관리를 유지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울러 서양식 외과수술의 도입을 통해 서양식 감염관리와 서양의학의 점진적 확산에도 공을 들였다. 이러한 절충적이면서 점진적인 병원공간의 변화는 동화의원이 관리했던 광화의원과 동화동원의 건립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광화의원과 동화동원은 개원시부터 중의와 서의가 공존했으며, 동화동원은 세균실험실과 엑스레이실까지 포함된 최신식 병원으로 설립되었다.<BR> 홍콩에서 서양의학과 근대식 서양병원의 도입은 선교의학과 식민의학이 주도했다. 반면 민간이 주도한 동화의원은 처음에는 중의학과 전통식 병원공간으로 구성되었지만, 홍콩 페스트 유행을 계기로 서양의학의 도입과 근대식 병원공간의 재편이 점진적이면서 절충적으로 이루어졌다. 동화의원은 식민지 홍콩의 도시사회가 페스트 유행을 계기로 공간 변화의 요구 속에서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생각된다. 근대의학의 공간화 과정에서 근대의학에 저항하고 균열되는 양상을 위생의 혼종성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보자면, 동화의원은 자신의 관점에서 근대의학의 공간화를 실현해 간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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