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파리강화조약이 논의되던 1919년은 세계와 동아시아가 급변하는 격동의 시대였다. 1911년 새로 출범한 중화민국도 아직 정국을 주도하지 못한채 혼란하였고, 1910년 일제에 강점된 조선은 식민지의 수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BR 이때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서구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는 중국이나 일제에 침탈된 조선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해방과 독립의 희망 속에서 정치와 문화적으로 난국을 타개하려는 거대한 운동이 일어났는데, 1919년에 일어난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이 바로 이 변화의 물결이었다.BR 조선의 3.1운동이 일본의 강점에 항의하여 독립 쟁취하려는 거국적인 독립운동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5.4운동은 서양의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특히 일본의 칭다오(靑島) 점거와 침략에 항의하는 정치운동과 아울러 수천 년 중국의 전통적 문화와 사상을 혁신하려는 신문화운동의 양면성을 가졌다.BR 조선에서 3.1운동의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기 어렵게 되자 일본 및 미국과 러시아 및 중국 등에 거주하며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 동포들은 상해에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춘원 이광수는 1919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동맹의 조직에 참여하고 2.8 독립선언을 위한 선언서를 작성한 후, 이 선언서의 발표 전에 중국 상해로 떠났다.BR 이광수는 상해에서 본국의 3.1운동 소식을 들으면서 신익희, 손정도 등과 함께 임정의원 평안도 대표로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도산 안창호와 협력하여 임정에서 임시사료편찬위원회의 주임과, 창간된 『독립신문』의 사장 겸 주필로 맹렬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과로에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산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실력양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그의 애국운동은 굴절하면서 국내에서 계몽과 문화운동을 위해 1921년 귀국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파란 많은 그의 활동과 생애는 1947년 사릉에서 『도산 안창호』를 쓰면서 거의 마무리되었다. 따라서 조국을 위한 애국운동으로 굴절된 그의 생애는 상해의 도산에서 시작하여 사릉에서 도산의 전기로 끝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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