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본 논문은 태종대 한양환도 후 태조의 거처로 건립된 덕수궁의 운용 양상을 통해 1차 왕자의 난으로 부정되었던 태조의 정치적 권위 회복 과정과 의미를 살펴본 것으로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BR> 태종은 한양환도 후 태조를 위하여 덕수궁을 새로이 건립하였다. 이곳은 창덕궁 뒤편인 興德洞 인근으로 비정할 수 있는데 惠化門의 도성 안측 권역에 해당하며, 훗날 창덕궁보다 크고 화려하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의 상당한 경역을 가지고 있었다. 태종은 창덕궁에서 지내면서 월 1회 이상 공식적으로 행차하였으며, 도성을 나가는 경우 보고하고 사냥을 하는 경우 예물을 바치는 등 부왕과의 긴밀한 관계를 과시하였다. 더구나 전위 소동과 외척 제거 사이에 태조와 태종은 경기일원에 40여 일간 동반하여 행차함으로써 입장을 조율하였다.<BR> 태종은 태조로부터 자신의 즉위를 인정받기 위한 방안으로 세자에게 傳位할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정작 河崙 등 재상들은 태종의 장인인 민제와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등 민씨 일족을 찾아 대응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것은 민씨 일족이 태조 보다 우선하는 정치적 규정력을 가지고 있는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태종은 물론이고 민제 집안에서 양육되어진 세자는 민제, 나아가 외숙들로부터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에 태종은 전위 소동과 연계하여 민무구 등을 숙청하였다.<BR> 한편 세자에게는 永樂帝에게 조현하도록 함으로써 외가를 대체하는 정치적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 이후 명에서 돌아온 세자는 태조의 병을 매개로 그의 역할을 대리하였다. 태종은 사망 직전 태조를 세자전으로 옮기고 창덕궁의 담을 허물고 정무를 중지한 채 적극적으로 侍病하였는데, 이것은 태조의 후계자인 태종과 세자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BR> 한양의 덕수궁은 창업주로서의 태조의 정치적 권위의 회복과 함께 태조와 세자의 연결 속에서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수립하려는 태종의 정치적 의도를 표상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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