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유민은 오랫동안 하나의 정치・경제・문화・지역 공동체를 유지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녔다. 때문에 금대 발해 유민의 상호 통혼 원인으로 발해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중요하게 거론되었다. 이는 분명 상호 통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발해 유민이라고 해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혼인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유의해야 된다. 지금까지 연구대상이 되었던 발해 유민들은 금대에 비교적 높은 정치・사회적 지위를 누리던 명문세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통혼 역시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발해 유민 외의 여진, 거란 등 이민족과의 통혼 역시 일정한 門格을 가진 이들과 이뤄졌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장여유 집안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장여유 묘지명을 소개함과 동시에, 그의 가계를 복원하고 장여유 집안을 사례로 발해 유민의 통혼망과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문격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장여유 집안은 7대에 걸쳐 명문세가로서의 문격을 유지하였고, 그에 걸맞은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들과 발해 유민의 통혼망은 처음에는 발해유민이라는 정체성과 지역 연고가 중요한 원인이었겠지만, 금대에는 문학적 소양과 進士 及第, 관료 경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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