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중종 9년 9월 삼사는 세조대 폐지되었던 의정부서사제를 다시 실시하자는 주장을 제기하였고, 오랜 논란 끝에 중종 11년 6월 전격적으로 복구되었다. 중종대 초반의 의정부서사제복구 논란은 조선시대 통틀어 의정부서사제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사례라는 점, 그리고 세조대 이후 유일하게 의정부서사제를 다시 실시한 경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중종대 의정부서사제 복구 논란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논의에 대한 사실적인 정리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며, 추진 주체와 그 이유에 대해서도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이에 이 글은 다음의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첫째, 중종대 초반 의정부서사제 복구 논란의 전개 과정을 상세하고 정리하고, 그 배경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대전후속록』 편찬 사업과 중종의 기묘사림 정책 수용에 주목하였다. 복구 추진 측은 全家徙邊律을 광범위하게 적용한 『대전후속록』 때문에 천변재이가 빈발하고 있다며, 국왕이 국정의 세세한 일까지 관여할 게 아니라 재상에게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계속 거부하던 중종은 중종 11년 5~6월 내수사 장리와 기신재 폐지, 박상과 김정의 사면 등 기묘사림의 정책들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의정부서사제 복구도 함께 명하였다. 애초 의정부서사제 복구는 삼사를 중심으로 범 신료 차원에서 추진되었는데, 중종 10년부터는 기묘사림이 이를 주도하고 있었다. 둘째, ‘조종지법’ 개념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제도적 정비가 일단락되는 성종대와 그것의 파행을 겪은 연산군대를 거치며 등장한 중종대에는 ‘조종지법’이 조선시대 그 어느 때보다 정책 결정의 중요 지표로 기능하였다. 의정부서사제는 그 대표적인 사안 가운데 하나였다. 복구 찬반 양측은 의정부서사제가 실시되었던 세종대, 그것을 폐지하였던 세조대, 그리고 『경국대전』의 의정부 직무 규정을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즉 ‘조종지법’으로 동원하였다. 이처럼 중종대 ‘조종지법’은 결코 특정 시기나 법전만을 의미하는 ‘닫힌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선택적으로 소환하는 일종의 ‘열린 개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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