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논문에서는 활발하게 진행된 개경 사원 및 국가의례에 대한 연구성과를 토대로 고려시대 개경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했으며, 그 구체적인 형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고려 수도 개경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불교신앙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았다.<BR> 고려 태조 때 25사에 이르던 개경의 사원은 고려말에는 300여 사로 증가하였다. 고려시대 개경에는 각 종단의 중심사찰이 고르게 배치되었고, 이후 왕실의 원찰들이 세워져 불교 중심지로서의 장대한 모습을 연출하였다. 고려는 각 사원에 불교 국가의례를 분담하여 진행함으로써 개경 전체를 불교 도시로 정비하였다. 국가에서 주도한 불교의례는 1월(2월) 연등회, 3월 가구경행, 6월 보살계도량, 7월 우란분제, 9월의 장경도량, 11월의 팔관회 등이다. 불교의례는 대체로 왕 혹은 관료들에 의해 주관되었고, 임금이 거처하는 왕궁으로부터 해당 의례를 설행하는 특정 절로의 행렬이 동반되었다. 이를 통해 개경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불교의례를 접하게 되었고, 불교의례 행렬을 위한 도로의 정비 등으로 신앙처의 방문이 용이해지고 많은 인원이 찾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을 것이다.<BR> 고려시대 사람들은 현생의 안락한 삶을 위해, 내세에는 극락정토에서의 삶을 기원하며 불교를 신앙하였다. 신앙의 형태는 계율의 실천으로부터 염불, 독경, 신앙처 방문, 신앙체 결성, 불사를 위한 시주, 사원 건립 및 출가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특히 개경에 사는 ‘서울사람들’은 고려시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빼곡하게 조성된 불교 도시에서, 매년 왕이 주도하는 세련된 불교의례에 참석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나아가 부처를 중심으로 한 동일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인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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