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고려시대에서 굴곡적인 삶과 죽음을 겪은 인물로서 공민왕을 손꼽을 수 있다. 그는 궁정 내부의 치정문제에 휩쓸려 환관과 측근 관원들에게 시해당했다고 하나 사실은 친원파 관원들의 친명정책에 대한 불만, 국왕과 권문세가와의 갈등 등이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중요한 요인이라고 논의되어 왔다. 1274년 공민왕 시해에 참여한 인물은 환관 최만생과 홍륜 등 자제위 소속 관원들이었다. 공민왕 대의 환관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최만생을 제외하고는 왕의 시해에 가담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므로 공민왕 시해의 주역은 홍륜 등 자제위 인사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관원들이 공민왕의 죽음을 핑계삼아 비판한 대상은 자제위 소속 권문세가의 자손이 아니라 환관세력이었다. 공민왕은 자제위를 설치하여 고위 관직자의 자제를 배속시키고 代言金興慶으로 하여금 총괄하게 했다. 자제위는 국왕 측근세력의 양성과 국왕의 신변보호가 주요 목적이라고 판단되는데 특히 국왕의 신변보호 기능이 매우 중시되었다. 공민왕대 고려는 정치적으로는 원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100년 가까이 원 영향력아래 있었던 흔적은 없앨 수 없었다. 명이 대도를 함락시킨 즉시 친명으로 돌아선 공민왕의 정책은 명의 고려에 대한 강압책과 맞물려 친원세력에게 불안감을 가져다 주었다. 공민왕으로서도 무조건 이들을 배척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 원인은 명에 있었다. 명은 요양행성평장 유익이 명에 귀부한 이후 고려에 위압적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말을 요구하였다. 고려 지배층은 원을 계승했다고 하여 명이 원대에 준해서 고려에 고압적이고 수탈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고려의 친명정책은 재고되어야만 하는 문제로 인식하였다. 이에 관원들은 친명책의 보루인 공민왕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홍륜 등이 국왕을 시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고려내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에 쫓기던 원의 관원들 중에는 초원지대로 돌아가기 보다는 脫脫不花를 고려왕으로 내세워 고려에 들어올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이는 공민왕의 강경대응으로 실패했지만 친원파 관원들의 분위기는 동요하게 되었다. 명 또한 공민왕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명은 요동을 폐쇄할 뿐 아니라 고려에 말 2000필을 요구하였다. 이에 최영은 말의 공납을 거부하는 제주목호를 치기위해 군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갔는데 이 틈을 타서 공민왕이 시해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자제위 관원, 脫脫不花를 내세운 원 뿐 아니라 명 또한 공민왕의 죽음에 간접적이나마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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